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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반미열풍 탄 「회교부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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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금 세계를 흽쓸고있는「호메이니」파동은 그의 파격적인 통치형태와 회교 민족주의가 기존 국제질서와 서구 기독교 문명에 도전함으로써 야기된 상충작용이다.
미대사관 인질사건으로 발단된 미·「이란」사태의 격랑은 「사우디」 의 「메카」 대사원 괴습사건을 고비로 미국·「이란」의 대결에서「이슬람」문화권 대 기독교 문명권, 선진국대 후진국의 싸움으로 탈바꿈한 느낌이다.
「메카」사원 습격은 미국의 소행이라는 「호메이니」의 비난이 보도되자 마치 기다렸다는둣이「파키스탄」회교도들의 미국대사관 습격·방화 사건을 선두로 인도양 동쪽 끝에서 북아의 서쪽끝에 이르기까지 회교권 곳곳에서 반미폭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회교도 민중들이 반미 주도>
「파키스탄」의 반미 폭동에 크게 고무되어 인질사건을「회교부흥」이라는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호메이니」의 기략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는 범회교도들의 반미 소동의 여세를 몰아 미국을 「사탄」으로 규정, 대미성전올 선포했다. 대미성전선포는 곧 불에 기름붓는 격이 되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반미열풍은 19세기말 이래 서구문명의 그늘 밑에 억눌렸던 약소국의 주체회복이라는 성격까지 가미되고 있다.
『강대국의 재3세계 지배는 종식되어야 한다』는 약소 민족의 잠재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세 732년「투르」전투에서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르멜」에 의해 서구침공이 저지돼 온 이후 1천여년간 쌓여온 「이슬람」 의 대서방 분노를 일시에 발산하려는 것 같았다.
「호메이니」가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의치면서 강대국 논리 위에 세워진 기존 국제법 질서를 거부하고 「코란」의 질서를 고집한 것이 잠자고 있던 회교 민족주의 의식에 크개「어필」한 셈이다. 「호메이니」는 치외법권이라는 법 질서에 대해 미대사관은 간첩행위를 해왔다고 주장, 『간첩행위는 회교의 도덕률에 어굿난다』고 맞섰고 정치범 부인도 원칙에 대해선 회교의 인과율, 즉 보복주의로 응수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은 회교권의 반미 열풍이 회교국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교도 민중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회교혁명 수출의 제1보>
「리비아」「시리아」 등 일부 강경파 회교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회교국 정부가 「호메이니」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아랍」 강경파 국가들은 대 서방 석유무기화를 다시 들고 나왔고, 이 때문에「아랍」국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물론「튀니스」에서 열렸던 15개국 「아랍」 정상회담에서조차 강·온파간 심각한 분열 현상을보이기까지 했다.
「아랍」 산유국의 「석유무기화」에 대해서는 서방이 「식량무기화」라는 대응「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석유에 골탕을 먹은 경험이 있는 서방으로서는 심리적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랍」세계 자체 안에 분열상이 노출되고 회교 민중에 의한 반미열풍이 계속 번져 나가는 현상은 「호메이니」가 노리는 회교혁명의 수출이 일단 성공으로의 제1보를 내디디고 있음을 말해준다.
회교혁명이 파급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토후국연방 「오만」 「아부다비」 둥 「페르시아」만 주변의 회교 거주국들이다. 이들 국가들은 작년말「이란」에 회교혁명의 횃불이 을랐을 때부터 그 불똥이 자기들에게로 튀어 올까봐 전전긍긍했었다.
회교 군주들이 미국의 「팔레비」두둔에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서도 「호메이니」의 대미 강경책에 반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호메이니」의 대미 강경책이 미국의 군사개입을 불러와 「페르시아」 만이 봉쇄되는 날이면 그들의 젖줄인 석유수송로가 막히고 곧 재정파탄에 직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특히 「사우디」는 이번「메카」의 「알·하바」 대사원 괴습사건으로 회교세계에서 위신이 크게 실추탰다.
「메카」는 전세계 8억 회교도들의 「마음의고향」·「영혼의 성전」으로 1년에 수백만명의 순례자들이 줄을 잇는 곳이다.
더구나 이 사건이 회교 「수니」파인「사우디」 왕실에 푸대접올 받아왔던 「사우디」 국내소수 「알·무시타린」파와 「마흐디」파 회교도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어서 「사우디」 내부의 종교내분으로까지 파급될 전망이다.
소련은 사건 초기 「이란」 접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바쿠」에 있는 『「이란」 민족의 소리』 방송을 통해「이란」 회교도 학생들을 지지했으나 그들의 목표가 단순한 「팔레비」송환올 둘러싼 대미항거에서 회교의 부흥으로 발전하자 태도를 1백80도 바꾸었다.
소련안의 3천만에 달하는 회교드와 특히 「이란」 접경 「카스피」해 부근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8백만의 회교도들에 회교 혁명의 물결이 번질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더구나 「이란」과는 1922년 「아제르바이잔」 영토병합 후 「이란」 국민의 적대감을 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회교국인 「파키스탄」 정부도 미대사관 습격 사건 후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지아·울-하크」대통령은 대부분이 회교도인 국민들의 감정과 대미 관계 사이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아프간도 엉거주춤>
이같은 현상은 친미국가인 「아랍」국가들에도 마찬가지로 친미겅부, 또는 왕실과 국민들간의 갈둥은 「이란」사태가 어떤 형식으로든 해결된다 하더라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친소 「아민」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역시 이 물결속에 반정부 회교도들의 시달림올 더욱 강하게 받을 전망이다.
인질 사태가 종식된다 해도 대미도전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심각해질지도 모른다.
현재의 사태는 23년전 당시 중동의「카리스마」적 지도자였던 「낫세르」와 서방간의 대결과 비교될 수 있는데 비록 시대와 인물과 명분은 다르지만 이 두 역사적 사건 사이에는 반 서방감정 고조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당시「수에즈」 운하 사건을 계기로 퇴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대영제국의 운명처럼 미국도 「테헤란」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같은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면 「앵글로-색슨」에의한 새계지배가 종식될 것이라는 예언은 맞을 날이 올 것이다. <이규진 기자>

<미-이란사태 일지>
▲10월22일 -「팔레비」 암 치료위해 「뉴욕」 도착.
▲11월4일 -「이란」 회교도 학생 「테헤란」주재 미대사관 점거.
▲5일 -「이란」, 대미 우호조약 폐기선언언.
▲6일 -「바자르간」내각 총사직, 혁명평의회 내각인수.
▲8일 -「이란」「팔레비」 체포영장 미국에 전달, 미국 대 「이란」 무기 군수부품 수출정지결정.
▲9일 - 미국 부두노조「이란」상품 선적 거부.
▲10일 -「카터」 위법체류 「이란」유학생 국외 추방지시.
▲12일 -「카터」「이란」석유수입중지 발표, 「이란」대미 석유금수 결정.
▲13일 - 미항공기의「이란」영공비행 금지,「미드웨이」호 항공모함 기동대 「아라비 아」해 진입.
▲14일 -「이란」 미국내 1백20억「달러」예금인출 선언,「카터」미 은행예치「이란」자산 동결조치.
▲15일 -「이란」「달러」화 석유대전 거부.
▲18일 -「이란」 미국인 인질 재판회부 및 처형 위협.
▲19일 - 여자·혹인등 인질 3명 석방.
▲20일 - 인질 10명 2차석방,「카터」선모「키티·호크」호 인도양 항진명령, 「사우디」무장회교도「메카」대사원 점거.
▲21일 -「파키스탄」회교도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 대사관 습격·방화.
▲22일 - 반미「데모」 회교국으로 확대, 석희찬씨 등 비미국인 4명 석방, 「조지·핸 슨」 미하원의원 「이란」방문 인질 석방 협상개시.
▲23일 -「이란」외채상환거부 선언,「호메이니」 세계회교도에 반미 성전 선언,「이 란」전군비상 경계령.
▲25일 -「이란」,「핸슨」의원에 인질면회 허용.
▲26일 -「발트하임」「유엔」사무총장 직권으로 안보리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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