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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679>|제66화 화교(5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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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전쟁이 났을 때 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왕십리에서 경화루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밖에 부근에 간장공장(덕천장유)과 마포 경기공고옆에 배갈공장(은주주조공장)도 갖고 있었다. 은주주조는 내가 자본을 대고 의형제간인 강만?씨가 기술을 맡아 동업형식으로 차렸다.
이 공장들은 규모는 크지않았지만 아직 30대초반이던 나로선 꽤 큰 사업을 벌인 셈이었다. 이밖에 나는 일찍부터 화교사회의 일도 맡아보았다.
1947년 자치구제도가 생기기 이전에도 하부 조직인 갑(반)이나 보(통)등은 이미 짜여져 있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화교들끼리의 연락·협조, 또 영사관등 행정조직과의 연계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반장격인 갑장을 거쳐 26세때부터 보장(통장격)일을 맡고 있었다.
6·25가 터지자 나는 주조공장 동업자인 강씨에게 18만원을 빌려주고 배갈 한「트럭」을 싣고 피난가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가족과 종업원들은 피난떠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서울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자유당정부의 말을 액면그대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놓고 있는데 서울로 북괴군이 들이닥쳤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들은 화교들의 동정을 파악키 위해 보장·갑장등을 찾아다니며 화교거주자 명단을 내놓으라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집에도 북괴군인들이 찾아왔다. 맞닥뜨린 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당신이 보장 진씨지? 당신관내 화교명단 내놓아!』
나는 시치미를 뚝 땄다. 『아니야, 나 진씨 아니야. 종업원이야. 주인은 모두 피난갔어.』
한국말이 서툰 것이 이럴 때는 편리했다. 나는 일부러 더 더듬으면서 말을 잘 못알아듣는 체했다. 북괴군은 잠시 추궁하더니 신분증을 보잔 말도 않고 그냥 내말을 믿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주로 지하실에 숨어 살았다. 꼭 움직여야 할 때는 종업원 행세를 했다. 갖고있던 보의 화교명단은 조그만 종이에 깨알글씨로 베껴놓은후 태워버렸다.
이후에도 북괴군은 보장집이라서 그런지 수시로 찾아와 여러가지 요구를 했다. 나중엔 인력차출 지시가 가장 많았다.
우리 보에서 하루 1명씩의 화교를 한강공사장에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때 한강에선 무엇때문이었는지 모래땅을 파고 흙을 져나르는등 공사를 벌였었다.
그런다고 그런 불안한 정세에서 동료 화교들을 공사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북괴군이 확인하러 찾아오면 종업원으로 가장한 나는 가짜 중국이름을 하나 대고 『오늘은 이 사람을 보냈다』고 둘러대곤 했다.
적치하에선 식량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쌀이 떨어졌을 때 나는 종업원 두명을 자전거로 경기도 평택에 보내 쌀 2가마를 사오도록 했다.
이렇게 겨우 구한 쌀도 갖고오다가 북괴군에 한가마를 빼앗겨 버렸다. 이 쌀도 떨어지자 정말 먹을 것이 없었다. 할수없이 우리는 집에 사놓았던 「가다꾸리」(녹말가루)를 비상용 음식으로 먹었다.
죽도 끓여먹고 지저먹기도 하는등 여러가지로 해먹었지만 녹말가루는 녹말가루였다. 단조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하는수없이 먹은 셈이지만, 그래도 그때는 어떤 진수성찬 못지않게 맛있었다. 이 녹말가루를 20부대가량 먹었을 때 9·28수복을 맞았다.
다음해의 1·4후퇴 때는 우리도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이번 피난도 순조롭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사당동 화교공동묘지옆 산길을 지날 즈음 앞에가던 「트럭」이 길을 막고 「클랙슨」을 크게 울리는 바람에 말이 놀라 뛰어버렸다. 이 충격으로 마차에 타고있던 만삭의 아내는 진통을 시작했다.
마침 그일대 봉황산의 산주인 화교 풍자주씨는 아버지와는 의형제로 부근에 살고 있었다. 나는 이분집에 가 아내의 몸을 풀도록했다. 이때 낳은것이 세째딸 난형이다. 풍씨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맡긴뒤 나는 홀로 피난길을 계속했다.
대구에 내려간 나는 칠성동사과시장에서 지난해에 먼저 피난온 동업자 강씨와 만나 그와 함께 있게 됐다.
대구에서 2년여 .휴전직후인 53년8월 나는 다시 귀경해 가족들과 재회했다. 서울집에 가보니 엉망이었다. 경화루와 마포 양조장 등은 문짝 유리창까지 누군가가 몽땅 뜯어가버려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었다. 양조장은 다시 계속하려 해도 재료를 못구해 팔아버렸다.
이렇게 내 피난생활은 여느 한국인의 그것과 별 다를바없었다. 그러나 당시 화교청년들중에는 자원해서 한국전에 출전해 전공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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