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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권위 → 경제 → 복지 … 프레임 잘 잡아야 권력도 잡는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7·30 재·보궐 선거 광주 광산을에 새정치민주연합이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축소 의혹을 제기했던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공천하자 새누리당은 연일 포화를 퍼붓고 있다. “거짓 폭로에 대한 대가 공천” “사후뇌물죄” 등…. 권씨가 “보은(報恩) 공천이라는 말에 화가 난다”고 발끈하자, 새누리당은 내심 흐뭇해하고 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저쪽(새정치연합)이 우리 쪽 프레임에 걸려들었다”고 했다. 그는 “7·30 선거 구도가 마뜩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조금 잡혀가고 있다. 권은희의 보상 공천, 기동민·허동준의 패륜 공천 등을 묶어 ‘막장 공천’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프레임 전쟁’ 시대다. 프레임(frame)은 원래 “사고의 틀이자 생각의 출발 지점”이라는 뜻의 학술 용어였지만 “권력을 잡으려는 자, 프레임을 잡아라”는 말이 결코 낯설지 않을 만큼 일반화됐다. 씨름판의 치열한 샅바 싸움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구도를 짜려는 프레임 대결이 선거판을 휩쓸고 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새누리당 전당대회 선거운동 중에도 프레임은 날카롭게 부딪쳤다. “의리의 서청원”이라는 구호처럼 서청원 의원이 김무성 의원의 배신 전력을 정조준했다면, 김 의원은 “과거냐! 미래냐!”로 서 의원의 구태 정치를 겨냥했다. “이번 당권 대결은 최초 프레임 싸움에서 사실상 승부의 추가 기울어졌다”는 말이 새누리당엔 암암리에 퍼져 있다.

문창극, 친일 프레임에 걸려 낙마
최근 프레임이라는 덫에 걸려든 인물이라면 단연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를 꼽을 수 있다. 그의 후보 지명부터 자진 사퇴까지 15일은 한국 사회에서 프레임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 날 KBS가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도로 그에게 친일·반민족 프레임을 씌우며 서막은 올라갔다. “위안부 배상은 받을 필요가 없다”는 문 후보자의 서울대 강의가 소개된 건 기름에 불을 끼얹는 꼴이었다. 프레임 형성 초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요소들 가운데 특정 부분만을 선택, 강조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과잉 단순화(oversimplification)’, 즉 거두절미와 짜깁기의 전형이었다.

 여론이 들끓자 “스스로 용퇴해야 한다”며 여권 내 이탈 기류가 생성됐고 “문 후보자가 총리로 적합하지 않다는 국민 여론이 70%”라는 여론조사도 나왔다. 여론조사·인터뷰 등을 통해 논쟁적인 이슈가 이미 특정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했다는 ‘동의 조작(manufacture of consent)’이 작동한 것이다.

 인지도가 거의 없어 대중이 최초 정보에 휘둘린다는 ‘초두 효과(primacy effect)’도 문 후보자에겐 불리한 요소였다. 여기에 논쟁 발생 일주일 만에 “난 안중근을 존경한다. 친일이라고 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반박한 건 이미 형성된 친일·반민족 프레임을 더욱 강화시켜줄 뿐이었다. 뒤늦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KBS의 보도는 전체 맥락을 무시한 채 짜깁기를 통한 왜곡보도”라며 여론조작 프레임을 제기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이토록 편향적인 프레임에 쉽게 사로잡힐까. 김원용 전 이화여대 교수는 “프레임이 가장 효율적인 사고 처리의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80년대 뇌과학 연구 결과 인간은 인지적으로 게으르다고 판명됐다. 최소의 에너지를 소비하며 일상생활을 영유하고 싶어한다는 얘기다. 복잡하게 넘쳐나는 정보를 일일이 합리적으로 따졌다간 골치 아플 뿐이다. 새로운 정보가 유입될 때, 그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 사고에 넣었다가 별 거부반응이 없으면 바로 통과시킨다. 이게 프레임이 유지되는 이유다.”

 프레임이 일시적인 유행이나 단순한 선동을 뛰어넘어 학술적 지위를 획득한 데엔 미국 프린스턴대 대니얼 캐너먼(Daniel Kahneman·80) 교수의 역할이 컸다.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자로 2002년 노벨상을 수상했던 그는 600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특정 지역에 질병이 몰아닥쳤다. 프로그램 A를 실시하면 200명을 살릴 수 있다. 프로그램 B를 실행하면 살아날 확률은 3분의 1이며, 사망할 확률은 3분의 2다.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사실 결과는 동일하다. 단지 표현을 달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험에 참가한 이들 중 78%는 앞쪽, 프로그램 A를 택했다. 인간이 갖는 손실 혐오 경향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언뜻 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를 연상시키지만, 결국 이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상황을 인식하는 방향도, 대응 방안도 달라질 수 있음을 수치적으로 입증한 실험이었다. 인간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오류투성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프레임의 위상과 중요성을 각인시켜 줬다.

프레임만 넘쳐나고 논쟁은 사라진다
프레임 이론이 대중적 폭발력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73)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2004년 출간되면서다. 민주당 지지자인 그는 미국의 진보 세력이 번번이 선거에서 패하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공화당이 제시하는 이슈에 반박할수록 그 프레임에 빠져든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선 오히려 진보 계열이 프레임 논쟁에서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다. 김원용 교수는 “보수는 자꾸 설명하려 드는 데 반해 진보는 규정짓기에 능하다. 2010년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농성자를 응원하기 위해 내려간 버스를 ‘희망버스’라고 부른 게 대표적”이라고 했다.

 최근 대선에선 프레임 싸움이 승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2002년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는 눈물을 흘리는 영상으로 인간적이며 탈권위적인 대통령 상(像)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2007년엔 이명박 후보가 ‘경제 대통령’을 들고 나오며 우위를 점했고, 지난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가 좌파의 ‘복지’ ‘경제민주화’ 프레임을 차용한 데 반해 문재인 후보는 ‘친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원용 교수는 “지금 국민들 사이엔 ‘대한민국이 붕괴되고 있다’는 기류가 있다. 3년 뒤 2017년 대선에선 유능하고 강력한 리더십 프레임이 어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프레임을 구축해야 위대한 지도자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단지 선거전략을 뛰어 넘어 프레임은 이제 정치의 일상이 됐다.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테러와의 전쟁’으로 명명했다. 김광웅 명지전문대 총장은 “단지 파워 게임이 아니라 복잡한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 프레임은 활용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통치권자를 공격할 때도 프레임은 유용한 무기였다. 노무현 정권의 ‘코드 인사’, 이명박 정권의 ‘4대 강 삽질’, 박근혜 정권의 ‘불통’ 논란은 야권이 끊임없이 제기하며 흔들어온 프레임들이었다.

 문제는 프레임은 넘쳐나는데 반해 건설적인 논쟁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논의를 프레임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형국이다. 우파는 ‘종북’ 프레임을, 좌파는 ‘친일’ 프레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여기에 판검사를 하다 옷 벗고 나와 개업하면 무조건 ‘전관예우’, 재벌 2세끼리 법적 분쟁을 벌이면 ‘형제의 난(亂)’ 등의 도식이 고착화돼 있다. ‘공무원=관피아’ ‘노조=사회 불만 세력’ 등의 낙인찍기도 만연하다.

 인터넷·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토론 문화가 인스턴트화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실체적 사실을 따지거나 디테일을 알아내려는 수고 대신 손쉬운 프레임에 기대는 경향이 커진 셈이다. 이동훈 전 배재대 교수는 “프레임 전쟁이 격화될수록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는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광웅 총장은 “사회적 다양성이 적다는 건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다. 프레임 전쟁이 사상(思想)의 시장을 극단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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