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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의 데뷔시절 김명인<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해마다의 세밑이 되면 나는 한때 내가 앓았던 열병으로 하여 아직도 마음 써늘해지곤 한다. 그것은 내 스무살 고비에 끼어들어 몇 년을 두고 나와 함께 한 신춘문예병(?) 때문이다.
대학2학년 시론강의 때문에 몇 편 써본 시가 그해 신춘문예 최종심사에 오르게된 뒤, 나는 열병을 앓고 회복하는 절차로 한해씩을 고스란히 보내버렸다.
충분한 습작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익어가지 못한 시가 누구에게 무슨 감동을 전할 수 있었으랴! 주위에서는 추천제도를 권해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신춘문예야말로 가장 정정당당하다는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학을 마치게된 나는 죽어버리고 싶다는 끝없는 절망감 뿐으로, 무작정 동두천에 찾아들었다.
정작 그곳에서도 나는 오래 있지 못하였다. 느닷없이 입대영장이 나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어차피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한 군대생활은 월남 땅에까지 나를 끌고 다니던 우여곡절을 끝으로 72년11월초 서울로 다시 돌려보내 주었다. 가판대에 놓인 신문마다 신춘문예사고가 실렸던 겨울의 초입이었다.
친구의 묘한 자극이 격려가 되어 갈곳조차 마땅찮던 나는 밤낮없이 시를 매만졌다.
12월초 원양어선 선장으로 떠나는 형을 전송하려 부산으로 내려갔다.
가난한 가족들 때문에 기약 없이 배를 타야하는 형에게 주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던 최대의 선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었다. 그것이 뒤늦게 우송하여 당선한 『출항제』였다.
그 20대의 한 고비에 나는 시를 위해 많은 것을 스스로 팽개쳐버렸던 것 같다. 시-아무도 대수롭게 보아주지 않을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던져버려도 좋다는 정열이 없었더라면 그다지 안타깝게 그 열병을 치를 어떤 필요가 있었을 것인가? 예컨대 손쉬운 삶의 길이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널려있다.
내 문학의 입문에서 신춘문예는 언제나 그 일회적인 절차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에 열광했다. 어차피 바탕 없이 행운을 누렸다면, 그 누구도 더는 화려할 수 없는 그 일회적인 박수를 끝으로 쉽게 잊혀져가야 당연하리라.
왜냐하면 문학은 누구에게도 끝끝내 편안한 삶을 베풀길 거부할 것이므로.

<73년도 신춘「중앙문예」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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