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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초강대국 미국은 어떻게 태어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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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927년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영웅이 됐다. 영국 서리(Surrey) 크로이던 비행장에 착륙한 그를 보러 몰려든 군중. [사진 까치]

여름, 1927, 미국
빌 브라이슨 지음
오성환 옮김, 까치
584쪽, 2만5000원

빌 브라이슨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여행·영어·과학·역사 등 다방면에 걸쳐 막히는 데가 없다. 입담도 대단해 한번 입을 열면 뿌리를 뽑는다. 그래서 팬을 몰고 다닌다.

 그런 브라이슨이 이 책에서는 미국이라는 공간을 씨줄로, 1927년이라는 시간을 날줄로 삼아 특유의 구수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왜 1927년인가. 브라이슨은 이 시기를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지적한다. 지금의 미국을 만든 맹아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살피면 지금의 미국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시기를 흔히 ‘광란의 20년대’로 부른다.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최강국으로 막 발돋움한 순간이었다. 금본위제도가 유지됐던 그 시절 미국은 세계 금의 절반을 보유한 ‘엘도라도’였다. 도시에는 전 세계 고층건물의 대부분인 5000채가 들어섰다. 바야흐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제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책에 ‘꿈과 황금시대’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

 이런 변화의 원동력은 물질적인 성장이었다. 이 시기 미국 제조업의 생산력과 기술력이 최고 수준에 올랐다. 당시 세계 물자 생산의 42%가 미국에서 이뤄졌다. 미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전 세계 자동차의 85%가 미국에서 생산됐다. 기업은 대량생산의 시대를, 소비자는 다량소비 시대를 누렸다. 대중은 ‘소비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고속질주했다. 냉장고·선풍기·전화기·라디오가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2680만 가구 중 1000만 가구가 자동차를, 1100만 가구가 전축을, 1750만 가구가 전화를 각각 소유했다. 소비는 사회적 미덕이 됐으며 누구도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물질적 풍요는 문화예술의 번성을 이끌었다. 재즈 음악과 아르 데코 디자인에 잔뜩 물이 올랐다. 맨해튼 할렘의 최고급 술집 ‘코튼클럽’은 불법적인 음주와 환상적인 재즈를 동시에 즐길 수 있던 장소였다. 이곳은 백인손님만 입장이 가능했는데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듀크 엘링턴을 비롯한 흑인 천재 재즈음악가들의 연주를 즐기며 술에 취해갔다. 당시 전 세계 영화의 80%가 미국에서 나왔다. 경제력이 문화 헤게모니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는 폭발적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구경거리에 대한 갈망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시도가 벌어졌다. 이 ‘아름다운 시절’은 1929년 10월 뉴욕증권시장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블랙 프라이데이’가 오기 전까지 계속됐다.

 이런 1920년대 중에서도 1927년은 특별했다. 미국이 유일하게 뒤져있던 게 항공 분야였다. 비행기를 발명한 미국의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1차대전 이후 항공발주량이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다. 하지만 미국은 그해 5월 홈런 한 방으로 이마저 역전시키고 만다. 찰스 린드버그라는 미네소타 출신의 촌뜨기 젊은이가 대서양 단독횡단비행에 성공하면서다. 구경거리를 갈망했던 부유한 미국인들은 린드버그의 전미 순회비행쇼에 열광했다. 당시 한창 성장하던 미디어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의 항공산업도 발전을 거듭해 세계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해 미국 최강 프로야구팀인 뉴욕양키스에선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홈런 경쟁을 펼쳤다. 미국인들이 베이브 루스를 그토록 사랑하고 두고두고 기억하는 건 그가 이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어서는 아닌지. 미국이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그 아름다운 시절 말이다. 이는 때로 마취제 역할도 할 것이다. 실업 증가, 내부 모순과 갈등의 증폭, 대외적인 국가위신 추락 등 현재 미국인들이 겪고 있는 갖가지 현실의 고통을 일시 잊을 수 있는 힐링 의약품으로서 말이다. 브라이슨이 이 책을 쓴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인 감성의 바닥에 깔린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되살리는 것 말이다. 추억 마케팅이리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브라이슨은 무조건 긍정 DNA만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해 8월 사코와 반제티라는 유명한 두 무정부주의자가 명확하지 않은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사건도 잊지 않는다. 미국의 치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민자들의 후손인 미국인들이 새로운 이민자들에 대해 이유 없는 공포심을 가지고 이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풍요와 자유 속에서 곰팡이처럼 성장한 불안의 그늘이다. 이민자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브라이슨의 시각이 엿보인다. 브라이슨은 이런 식으로 미국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유전자를 분자 단위로까지 미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시도가 나오도록 자극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읽을거리, 생각거리, 볼거리를 동시에 주는 드문 책이다. 원제 ‘ONE SUMMER: America, 1927.’

[S BOX] 활자 전성시대 1920년대 … 날개 단 신문과 잡지

많이 읽는 국민은 강하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가로 자리 잡기 시작한 1920년대는 활자매체의 전성기였다. 텔레비전이 나오기까지는 두 세대가 남았고 라디오도 나오기 직전이었다. 이 시대 무엇보다 신문이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1920년대 1가구 1.4부꼴인 하루 3600만 부가 팔렸다. 일간지가 뉴욕시에서만 12개가 나왔고 거의 모든 주요도시에서 2~3개 꼴로 발행됐다.

 범죄·스포츠·가십 등 3대 흥밋거리를 앞세운 타블로이드 신문이 등장해 일간지에 대한 대중의 입맛을 바꿔놓은 시기이기도 하다. 시카고 트리뷴 발행인 가문 출신의 로버트 매코믹과 사촌 조지프 페터슨이 1차대전 중 영국에서 군복무를 하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블로이드 ‘데일리 미러’를 보고 사업 가능성을 읽은 것이다. 이들이 1919년 6월 뉴욕에서 창간한 ‘일러스트레이티드 데일리 뉴스’는 초기 1만1000부를 내던 것이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뉴욕타임스의 두 배가 넘는 100만 부를 찍어냈다.

 출판업계는 10년 전의 두 배나 되는 매년 1억1000만 권의 책을 펴냈다. 북클럽이 줄줄이 생겼고 작가들은 오늘날 아이돌 스타를 넘어서는 인기를 누렸다. 잡지도 전성기였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22), 타임(1923), 뉴요커(1925) 등 미국을 대표하는 잡지의 다수가 이때 탄생했다. 미국의 힘은 읽는 데서 나왔다. 브라이슨이 이 책에서 1927년의 상황을 이토록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도 시대를 풍성하게 기록했던 활자매체 때문일 것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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