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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4급부터 7단까지 … 54개국 아마 54명 유쾌한 '수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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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7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세계아마바둑선수권 대회 대국 모습. 전 세계 아마 바둑팬들이 모여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 한국기원]

수담(手談)을 즐기시는지? 바둑의 별칭이다. 손으로 하는 대화니 곧 말 없는 대화다. 하지만 바둑을 조용한 놀이라고 보면 속단이다. 여럿이 우르르 모여들어 잔치판을 벌이듯 두는 맛도 좋다.

 국제바둑연맹(IGF) 주최 제35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 대회가 5~9일 경북 경주시 호텔현대에서 열렸다. 54개국 54명이 참가했다. 1인당 8판을 두는 8라운드 스위스 리그(Swiss league·승자는 승자끼리 패자는 패자끼리 두는 방식으로 탈락자가 없다)로 시합한다. 누구나 다 하루 2~3판을 두게 된다.

 무엇보다 참가 선수들이 다채롭다. 최연소 선수는 베트남의 보녓민(Vo Nhat Minh ·12·학생) 2단이고 최고령 선수는 브라질의 딕 사바(Deak Csaba·73·무역업) 초단이다. 실력은 4~1급이 6명이고 초단~7단이 48명으로 고른 분포를 이뤘다.

 유럽에서는 31명이 왔는데 ‘집시(Gipsy)’의 기운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수학자·프로그래머·교사 등 전문직이 바둑을 즐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성품으로 본다면 자유로운 정신들이 많았다.

 “그냥 즐길 뿐”이라는 바하두르(B T Bahadur·62)는 유럽의 변방 아제르바이잔에서 왔다. 6단의 실력인데 배가 많이 나온 태평스러운 타입이었다. “주변에 애호가가 별로 없어서 인터넷으로 대국한다”는 인도의 샨 소니(Shan Soni·여·34·자영업)는 대회 중간 쉬는 시간엔 자신의 인터넷 쇼핑몰을 소개하는 데에도 바빴다. 기력은 초단. 아쉽게도 참가자 중 여성은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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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 참가비는 개인 부담이다. 바둑도 두고 세상 여행도 하자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서로가 페이스북에 친구로 등록되고 대화 주제는 다양해졌다.

 그래도 시합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은 높아졌다. 한국의 위태웅(21·아마 7단)은 대회 이틀째 오전에 대만 선수에게 반집을 져서 2승1패로 우승이 멀어졌다. 인도의 샨 소니는 3패로 울상이 됐다. 바하두르는 6단의 실력이지만 강자를 만나 1승 2패. 그래도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엔 많은 선수가 여러 방식으로 회합을 가졌다. 대화를 나눴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고 많은 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쾌활한 가운데 저녁 노을이 졌다.

 대회가 처음부터 잔치 분위기를 띤 것은 아니다. 1979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회엔 15개국 30명이 참가했는데 토너먼트 방식으로 시합했다. 한 판 지면 곧 떨어져 우승자 외에는 모두 패자가 됐다. 그래선 잔치가 될 수 없어 스위스 리그를 채택했다. 실력이 약해도 우승자가 가려질 때까지 둔다.

 대회가 승부를 지양한 지는 20년이 채 안 된다. 88년 후지쓰배, 89년 응씨배 등 프로세계대회가 생긴 이후 아마대회에서 한·중·일의 각축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들도 참여를 늘리기 시작했다.

 한·중·일의 1등 추구 강박에도 이유는 있다. 늦은 근대화 때문에 서구에 침탈당한 과거가 있어 남들보다 앞서야만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대회를 참관한 미국바둑협회 회장 앤드루 오쿤(Andrew Okun·52)이 세계 바둑의 흐름을 요약했다. “세계는 동호회 활동을 즐깁니다. 참여가 곧 즐거움이죠.”

 이번 대회는 대만의 쟌이뎬(詹宜典·21) 아마 7단이 7승1패로 우승했다. 한국 대표인 위태웅 아마 7단은 같은 7승1패지만 승점에서 1점이 부족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잔칫집엔 아픔이란 없다. 패배도 즐겁다.

문용직 객원기자

◆국제바둑연맹(IGF)=1982년 3월 29개국을 회원으로 창설됐다. 현재 74개국(유럽 37·아시아 17·아메리카 15·아프리카 3·오세아니아 2), 4개 단체(세계페어바둑협회·유럽바둑연맹·응창기바둑교육기금회·이베로아메리카바둑협회)를 회원으로 둔 세계 바둑계 최대의 정책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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