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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4)|<제66화>화교(9)-장꾸에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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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관민과의 마찰 등 어쩔 수 없는 초기의 진통을 겪으면서도 화교세력은 화상의 눈부신 활약을 주축으로 해가 다르게 커져갔다. 더우기 1884년 일본이 배후 조종한 갑신정변의 실 폐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화상은 숫적으로나 경제적 기반에서 훨씬 우세했던 일상들을 오히려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다.
임오군란 후 청일전쟁(1894년) 직전까지 인천·부산·원산 등 세 개항지에서의 양국의무역량을 비교해보면 이같은 현상이 곧 드러난다.
1885년만 해도 세 개항지부역량의 82%는 일본이 차지했고 청국은 18%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7년이 지난 1892년엔 청국45%, 일본55%로 두 나라의 무역량이 거의 대둥한 워치에 놓이게 됐다.
이 시기에 화상세력이 얼마나 컸었는가는 경쟁자였던 일본인들의 관찰보고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l893년 조선일대를 돌아본 일본인 말영순일랑은 이렇게 썼다.
『청국인은 조선인에 대해·항상 공급자의위치에 섰으며 일본인은 오히려 수요자의 지위에 있다. 조선인의 수용품 중 중요한 것은 모조리 청상인 에게 서 공급받고 있으므로 일본인은 그 하수, 혹은 약간의 구전을 받고 위탁판매를, 하고있다. …그러므로 조선인에게는 일본인이 중요한 거래선이 되고 있으나 상권의 대부분은 이미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1891년에 발표된 신부순간의 저서 『한반도』에서도 『인천의 무역은 대체로 수출권은 일본이 쥐고 있으나 수입권은 청상의 손에 있다』고 청상의 세력을 기술하고 있다.
불과 1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화교들이 이처럼 조선의 상권을 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당시 중국정부의 영향력이 컸다는 점도 한 요소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일제치하 에서도 계속 뻗어나간 화교세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같은 비약적 발전의 가장 큰 요인은 화교, 또는 화상 자체가 갖고있는 어떤 내재적 장점에서 찾아야한다.
이른바 「중국인의 상술」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분석을 해온 것으로 안다. 그 글들 중에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된 점도 없지 않지만, 중국인 자신들은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을 객관적 입장에서 지적해준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술」이라는 말 자체를 나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 이 말에는 어쩐지 기회주의적이고 얄팍한 상인의 재치를 가리키는 듯한 어감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화교의 급성장에는 단순한 「상술」이 아닌, 보다 건실하고 내재적인 요소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먼저 화교기업의 특성을 보면, 외국에서 사업을 벌여야하는 기업에 가장 적합한 자본주의적 경영형태를 그때부터 지니고 있었다. 기업의 자본과 경영이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 「재동」이라 불리는 자본주의는 경영에 일체 간섭하지 않고 「총 경리」(사장)에게 모든 실제 업무를 맡겼다. 「재동」은 자본을 대고, 「총 경리」는 지능을 투입한다.
무역상 뿐 아니라 직물상·잡화상 등 한국화상들의 점포는 특이한 합자조직을 갖고 있었다. 출자자 수는 보통 2, 3명∼4,5명으로 국한돼 있었으며 가장 많은 자본을 댄 「재동」은 대부분 본국(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실제 경영권을 쥐고 있는 것은 지배인격인 「장궤적」(강꾸에이)이었다. 한국인들은 흔히 「짱꿰」란 말을 중국인의 대명사처럼 써오고 있는데 사실은 「장궤」란 지배인, 혹은 가게주인이란 뜻이다.
「장궤적」은 대체로 고용인이라기보다는 노력을 출자한 재동인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배당은 받았지만, 급료는 따로 없었다. 「장궤적」밑에는 외궤적(섭외 및 거래주임) 관진적 (회계주임) 과계(점원) 학도적(견습소사)등의 직원들이 있었다. 실무를 맡는 과계의 급료는 연급으로 지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직원의 채용을 비롯한 일체의 경영권은 「장궤적」이 쥐고있었다. 당시 큰 상회에는 30∼40명 이상의 점원들이 있었는데 거의 전부를 본국 고향부근에서 불러와 채용했었다. 이들에게는 업무성적과 회사수입에 따라 다소의 장여금이 지급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휴가를 주어 고향으로 귀성시키는 등 업무의욕을 돋우기 위한 각종 장려책이 일찍부터 실시됐었다.
화상점포는 대규모이건 소규모이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능률을 올리기에 알맞은 경영형태로 조직돼있었다.
이같은 합리적 경영형태는 화교특유의 거래방식인 「신용거래」에 의한 자본과 상품의 조달과 함께 화상발전의 지주역할을 했다. <계속> 【춘유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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