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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미디어가 심은 사랑의 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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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직업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자다. 대부분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하지만 배우자의 선택과 관련해 체계적인 공부와 노력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떻게 해야 연애를 잘 할 수 있는가, 갑작스러운 이별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부부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각자 주워 들은 풍월과 상식으로 적당히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합리성을 숭상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왜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치려 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는가? 그것은 로맨틱 러브라는 우리 시대의 왜곡된 사랑 관념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로맨스(소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로맨틱 러브라는 관념은 영상 매체의 출현 이후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 수많은 연인들은 "사랑 이데올로기라니? 우리의 사랑은 우리 둘만의 것이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사랑에 빠진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행위와 대화는 거의 다 영상 매체와 대중가요가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쳐 준 것에 불과하다.

영상 매체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를 아주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상 매체가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키스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랑을 속삭일 때 어떤 내용을 어떤 톤으로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사랑의 행위는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사랑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영화, 텔레비전, 광고, 게임, 대중가요 등에 젖어 버린 우리는 마치 전체주의 국가의 매스게임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연인과의 사랑에 빠진다. 그 획일적인 사랑 게임에 아직 빠지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 핵심적인 것을 결핍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영화나 연속극에서의 사랑은 "너만을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연인의 등장으로 결국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따라서 연애와 결혼이라는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나만을 사랑해 줄 내 짝을 찾아내느냐의 문제로 환원되고 만다.

사랑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온갖 역경을 사랑으로 극복한 주인공들이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돼 있다. 이러한 사랑 이데올로기에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 젊은이들은 결혼만 하게 되면 앞으로 저절로 행복한 삶이 펼쳐지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지만 연인관계와 부부관계는 서로 다른 원칙과 행동 유형에 의해 지배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다.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별다른 노력 없이 연인관계가 자동적으로 부부관계로 변화해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 열정적인 연애 끝에 결혼한 부부일수록 이혼율이 높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대중 매체가 심어준 사랑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이 아름다운 봄, 연속극 흉내는 그만두고 스스로 감독과 주인공이 되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가길 바란다.

김주환 연세대 교수.신문 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