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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달러, 나 좀 보세 … 유로가 뿔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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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우리(유럽국)끼리 비행기를 사고파는 데 달러를 씁니다. 꼭 그래야 합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6일(현지시간) 열린 경제 콘퍼런스. 프랑스 재무장관 미셸 사팽은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작심한 듯 발언을 쏟아냈다. “달러 대신 다양한 통화를 써야 한다. 통화 간 균형을 다시 잡는 일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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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세계 경제의 지배자는 달러다. ‘달러 왕좌’에 그동안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왕좌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이번에 프랑스가 흔들기에 나섰다. 일주일 전 사건이 불씨가 됐다. 미국 법무부는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에 89억 달러(약 9조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를 어기고 이란·수단 같은 나라와 금융거래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처벌을 막으려 프랑스 내각이 총출동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벌금을 조금 깎는 선에 그쳤다. BNP파리바는 1년치 순익(2013년 66억 달러)을 훌쩍 넘는 돈을 고스란히 미국 정부에 벌금으로 내게 생겼다.

 굴욕을 맛본 프랑스 정부가 반격을 시작했다. 공격 목표는 달러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BNP파리바 건을 계기로 프랑스가 전 유럽에 달러 대항군 ‘소집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호응은 뜨거웠다. 프랑스 40대 기업 가운데 한 곳의 최고경영자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대량의 달러를 거래한다는 이유로 온갖 미국 법규에 얽매여 있는데 우리 같은 회사는 이런 상황을 원치 않는다”며 쌓인 불만을 털어놨다.

 프랑스는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8개국)에 속해 있다. 유로화의 영향력은 달러화에 뒤지지 않는다. 전 세계 결제 비중으로 따진다면 두 통화는 선두 자리를 놓고 해마다 엎치락뒤치락했다. 올 5월 기준 달러화가 41.63%로 1위를 차지했지만 유로화(32.35%)가 뒤를 바짝 쫓고 있다. 1년 전엔 유로화(37.46%)가 1위로 달러화(36.52%)를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이 아닌 수출 시장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무역 결제 통화로는 달러화의 위상이 압도적이다. 물건을 사고팔 때 사용하는 돈 중에서 달러화의 비중은 87%에 이른다. ‘오일 달러(Petrodollar)’ 덕분이다.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금을 기반으로 한 달러 중심의 세계 통화 체계)’를 깬 리처드 닉슨 정부는 대안으로 석유를 선택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해 원유 결제 통화로 달러를 못박았다. 중동이나 신흥국은 석유·가스를 팔아 달러를 받고, 다시 이 달러로 상품을 샀다. 석유 파동(오일쇼크)과 베트남·이라크전쟁, 금융위기에 경쟁 선진국 통화의 도전까지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미국은 40년 넘게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 패권을 지켜냈다.

 미국계 못지않은 석유 권력을 갖고도 달러화만 써야 했던 유럽계 석유기업의 불만은 컸다. 사팽 장관의 주장에 프랑스 석유업계가 서둘러 화답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프랑스 1위 석유회사 토탈의 최고경영자 크리스토프 드마르제리는 “배럴당 석유 가격이 달러로 고시되긴 하지만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달러-유로 환율에 따라 유로화로 결제하는데 정유사들이 동의하면 될 일”이라며 새로운 차원의 통화전쟁을 예고했다.

 물론 쉽게 통화 왕좌 자리를 내놓을 미국이 아니다. 64년에도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미국이 달러로 과도한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이후 수십 년간 달라진 건 없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 1분기 전 세계 중앙은행이 비축하고 있는 통화 가운데 달러화는 60% 이상을 차지한다.

 이날 사팽 장관은 유럽재무장관회의에서 이 안건을 주요하게 다루겠다고 벼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결제 통화) 재조정 대상엔 유로화만이 아니라 세계 무역에서 영역을 키워가는 신흥국 최대 통화도 들어가야 한다.” 중국 위안화의 참전과 동맹을 노골적으로 요청한 셈이다. 그는 유로화를 제치고 세계 2위 무역 결제 통화로 부상한 중국 위안화에 주목했다.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 깃발을 내걸고 통화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달러 같은 다른 통화 간섭 없이 위안화 직거래가 가능한 청산결제거래소를 유럽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개설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방한에 맞춰 지난 3일 한·중 정부가 위안화 직거래 시장 설립에 합의한 게 대표적이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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