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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전 유럽 산업혁명 확산 촉매 된 만국박람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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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호 20면

그림 1 빈터할터, 1851년 5월 1일, 1851년.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왕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기품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는 독일 출신인 빈터할터(F. X. Winterhalter)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한 후 프랑스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하였다. 유럽 각국의 왕족들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범 유럽적 인기를 누린 화가였다. 그림 1은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왕실을 묘사한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는 대영제국의 수장인 빅토리아 여왕이고, 그 왼편에 서 있는 남자는 남편인 앨버트 공이다. 금슬이 좋았던 두 사람은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 그림 속의 아기는 일곱째인 아서 왕자다. 흰머리의 남자는 과거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한 맹장 웰링턴 공이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⑨ 영국 산업혁명의 결정판 만국박람회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빈터할터의 솜씨를 높이 평가하여, 1842년부터 20년에 걸쳐 자주 그에게 왕족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림의 제목은 『1851년 5월 1일』이다. 이 날짜가 그림의 주제를 말해준다. 이날은 아서 왕자의 첫돌이자 웰링턴 공의 82번째 생일이었다. 웰링턴 공은 아서 왕자의 대부(代父)이기도 했다. 그림에서 고령의 웰링턴 공은 아서 왕자에게 장식함을 선물하는 것으로, 그리고 아서 왕자는 웰링턴 공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1851년 5월 1일은 영국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념일이었다. 경제사적으로 본다면 왕자와 고관의 생일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 날짜였다. 과연 무엇을 기념하는 날이었을까?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앨버트 공의 눈길이 향하는 왼편을 보면 둥근 지붕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을 뚫고 건물을 향해 비치는 햇살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로 이 건물이 우리가 주목할 대상이다. 이 건물은 1851년에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인 대박람회(Great Exhibition)의 전시장이었다. 5월 1일은 바로 이 대박람회가 개최된 날이었다. 앨버트 공은 박람회 개최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후원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선이 이 건물을 향하도록 화가가 그린 것은 이를 반영한 것이리라.

그림 2 조셉 내쉬, 『디킨슨의 1851년 대박람회총람집』, 1854년.

수정궁 구조, 남미 식물 잎에서 착안
대박람회의 개관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여왕을 위시한 주요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이 참석했고 수많은 외교사절들이 자리를 빛냈다. 오늘날의 국제박람회와 마찬가지로 개별 국가들은 자국의 부스에 진귀한 물품들을 전시하였다. 자국의 문화적 취향과 기술 수준을 과시하는 현장으로 여기고,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 예술품과 해외에서 들여온 이국적인 물품들을 펼쳐 보였다. 영국은 이런 전시품 이외에 동력기계, 공작기계, 운송기계 등 다양한 기계들을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전시품보다 관람객의 시선을 더 강하게 끈 것은 전시장 건물 자체였다. 이 건물은 당시의 다른 건물들과는 사뭇 달랐다. 철골 구조에 유리판을 끼워서 만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건물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였다.

언론에서는 이 건물에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의 설계에 따라 건설된 건물은 좌우가 564m, 앞뒤가 139m였고, 높이가 41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더 놀라운 점은 건물의 혁신적 구조에 있었다. 1,000개가 넘은 주철 기둥 위로 2,000개 이상이 격자 대들보가 놓이고 총 45km에 이르는 철골에 의해 건물의 세부적 틀이 갖추어졌다. 여기에 18,000장의 유리판이 설치됨으로써 건물이 완성되었다. 그림 2에서 관람객이 느꼈을 시각적 전율을 공감할 수 있다.

그림 3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실린 초대형 수련. 1849년.

팩스턴은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구상하게 되었을까? 흥미롭게도 그의 아이디어는 멀리 남아메리카에서 자라는 한 식물로부터 출발하였다. 서구 열강들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지구 곳곳의 자연에 대한 지식도 축적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1830년대에 유럽에 처음 알려진 남아메리카의 수련 한 종류가 곧 정원사들에게 각별한 인기를 끌었다. ‘빅토리아 아마조니카(Victoria Amazonica)’라고 명명된 이 수련은 다 자라면 잎이 지름 3m나 되었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물에 떠 있는 잎의 부양력이 대단히 커서 그 위에 어린 아이가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팩스턴은 데본셔 공작의 대저택인 채츠워스 하우스의 정원책임자였는데, 그는 이 수입식물을 위한 온실을 짓고 잘 보살펴 꽃을 피움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림 3은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삽화로, 딸을 연 잎 위에 올려놓고 자랑스러워하는 팩스턴이 등장한다.

유럽이 축적한 세계화 성과 박람회에 집약
이 식물에 대한 팩스턴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수련 잎이 무거운 아이를 지탱할 수 있는지에 호기심을 느꼈는데, 곧 해답의 열쇠가 잎 뒷면의 구조에 있음을 알아냈다. 핵심 뼈대들과 그들을 잇는 가로 뼈대들로 이루어진 구조가 강한 지지력의 비밀이었다. 팩스턴은 당시 진행 중이었던 만국박람회 전시장 공모전에 이런 구조를 담은 설계안을 제출하였다. 심사위원들은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룬 영국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혁신적 디자인이라고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와 공사기간 면에서도 전통적 건축물을 압도하는 경제성을 보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수정궁은 단지 영국의 공업생산력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의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과 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창의적 사고를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했다. 지식과 기술의 세계화가 낳은 긍정적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팩스턴의 실험적 건물은 대성공이었고, 박람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6개월의 개관 기간에 하루 평균 4만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여 총 60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하였다. 당시 영국 총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관람객 대다수는 영국인이었겠지만,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박람회를 직접 방문할 만큼 관심이 크고, 여행을 할 경제력과 여가가 있는 사람은 해당 국가의 상류층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람회는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공업화 없이는 미래에 강국으로 남을 수 없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들이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성장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국가 간의 경쟁을 부채질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유행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만국박람회는 이런 경쟁의 소산이었다.

그림 1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를 거치면서 영국이 누리게 된 전성시대를 3중으로 표현한다. 웰링턴 공은 강력한 경쟁국 프랑스를 누르고 군사강국을 이룬 영국의 성취를 상징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다산은 대영제국의 번영이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버트 공이 마음을 쏟았던 수정궁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이룬 국가, 멀리 남아메리카의 야생 식물에서 얻은 힌트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지식기반경제의 탄생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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