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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단원성장' 절호의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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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지난 25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앞에 버스 4대가 도착한다. 학생들은 ‘remember 0416’이라고 적힌 노란 팔찌를 차고 버스에서 내린다. 곧이어 학생대표가 사회에 호소하는 글을 읽어 내려간다.

 “우리를 평범한 학생처럼 대해 달라…. 이제는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그만 가져달라.”

 71일 만에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의 팔찌와 호소문에서 대조적인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잊어 달라’ ‘잊지 말아 달라’.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무엇을 망각하고, 또 기억해야 하나.

 27일 오후 이화여대 SK텔레콤관. 국민대통합위원회 주최로 ‘국가적 재난 치유’ 토론회가 열렸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큰 아픔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훈과 함께 대한민국의 또 다른 미래를 보게 해 주었다.”

 한광옥 위원장의 개회사가 끝나고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가 ‘재난, 외상 후 성장의 기회’ 주제로 발표를 시작했다. “트라우마틱한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현명하게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할 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1980년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했다. 15년 뒤인 95년 외상이 오히려 삶에 대한 의미와 용기를 찾게 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다. 학자들은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수많은 ‘외상 후 성장’ 연구가 의학 분야에서 나온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은 일반인에 비해 삶에 대해 더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곽 교수는 ‘외상 후 성장’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 자신의 삶과 주변에 더 감사한다.

 ▶ 친구와 타인을 향한 동정심이 커진다

 ▶ 어려움을 이겨낼 내적 힘을 갖게 된다

 ▶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개인 심리를 넘어 공동체로 보면 세월호 참사는 뒤처진 사회 분야를 단숨에 혁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외상 후 사회발전은 거저 오지 않는다. 개개인과 사회공동체가 열망하지 않으면, 적절한 치유책을 세우지 않으면 상처 위에 새살은 돋아나지 않는다.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놓았다.

 “집단쇼크와 절망감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게 유가족에 대한 예의다. 언론이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끌고 가야 한다.”(유상욱 JTBC 취재팀장)

 “사회통합은 집합적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사회수준에서 함께 협력하고자 하는 개인 의지에 기반을 둔다. 자원봉사 활성화가 필요하다.”(정진경 광운대 교수)

 “재난 외상은 국민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종합적·체계적 지원법이 반드시 필요하다.”(최태산 동신대 교수)

 세월호 참사 직후 대통령도, 정치권도, 언론도 ‘새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다. 70여 일 지난 지금,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 법령을 내놓아야 할 국회는 정쟁에 몰두해 있다. 국가개조를 내세웠던 정부는 진영도 못 갖추고 지리멸렬하다. 지금만 보면 ‘새로운 대한민국’은 말짱 도루묵이다. 이런 참담하고 어처구니없는 재난을 당하고도 나아진 게 없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우리는 가난 속에서 산업을, 독재하에서 민주정치를 이루어냈다. 이제 생명경시의 시대에서 ‘단원성장’을 성취해내야 한다. 수많은 어린 학생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잊을 것은 탐욕과 불신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회발전의 열망이다. 비록 그것이 바위 위에 깊게 새겨진 글을 손바닥을 지우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