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불모지대』라고 일컬어지는 울산지방에 항일지사 박상진의 자취를 더듬어 잊혀져 가는 울산지방의 긍지를 되살려보려는 운동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지난해 3월 문공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후 유족들과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박 의사의 전기를 간행하고 전기 추모행사를 계획하면서 울산시내 교사 등 젊은층의 호응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박 의사는 한일합방 후 조직적인 한일투쟁을 위해 1915년 대한광복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구한말 의병운동과 후기광복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1921년 38세의 나이로 순국한 후 그가 뿌린 씨앗은 막료였던 김좌진 장군에 의해 「청산리전투」에서 꽃을 피웠던 것.
개인의 인품과 경력을 제외하고도 그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못 크다. 그런데도 해방 후 그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기 때문에 울산지역주민들도 지금은 자세히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4·19혁명 후 당시 민의원으로 있던 김택천씨를 중심으로 『이제는 박상진 의사를 후세에 알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추모사업회가 탄생된 것.
김 의원이 사재를 기증하여 학성공원이 된 옛 임진왜란때의 전장터에 기념비를 세우게 됐다. 각 고등학교 학생대표의 추모사, 민의원 의장이었던 곽상훈씨의 추모사 등이 준비됐다.
박 의사의 행적은 워낙 일 자체가 비밀을 요했고 비밀결사조직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자료가 희박할 뿐 아니라 구전되는 자취조차 수집하기 매우 어렵게 되어있다. 다만 일제당시 고등계형사로 있던 한국인이 펴낸 「고등경찰비사」라는 자료와 요행히 일본어로 남아있는 박 의사의 예심판사조서가 유일한 흔적이다.
울산시 송정동에 있는 박 의사의 생가는 상당히 오래된 고가의 모습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요즘 형편 같아서는 이 집조차 제대로 보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날로 그 위용의 도를 더해 가는 공장의 탑 그늘 속에서 오늘의 울산시민 뿐만 아니라 여타지방에서도 박상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있다.
그러나 일선교사를 비롯한 교육관계자 및 일부 젊은층에서는 어떻게든지 「울산의 얼」을 되살려야 한다는 명분아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청의 조홍제 중등교육계장은 교육자료를 편찬했고 .일선 교사들은 장래 울산의 주인이 될 학생에게 선열의 장거를 새삼 깨우쳐 주고 있다.
공업도시 울산이 낳은 유일한 의사 박상진 의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이제 젊은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울산=장현준 기자】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