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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긍지를 되살리자" 항일 투사 박상진 행적 찾기 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신문화의 불모지대』라고 일컬어지는 울산지방에 항일지사 박상진의 자취를 더듬어 잊혀져 가는 울산지방의 긍지를 되살려보려는 운동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가 지난해 3월 문공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후 유족들과 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박 의사의 전기를 간행하고 전기 추모행사를 계획하면서 울산시내 교사 등 젊은층의 호응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박 의사는 한일합방 후 조직적인 한일투쟁을 위해 1915년 대한광복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구한말 의병운동과 후기광복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1921년 38세의 나이로 순국한 후 그가 뿌린 씨앗은 막료였던 김좌진 장군에 의해 「청산리전투」에서 꽃을 피웠던 것.
개인의 인품과 경력을 제외하고도 그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못 크다. 그런데도 해방 후 그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기 때문에 울산지역주민들도 지금은 자세히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4·19혁명 후 당시 민의원으로 있던 김택천씨를 중심으로 『이제는 박상진 의사를 후세에 알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추모사업회가 탄생된 것.
김 의원이 사재를 기증하여 학성공원이 된 옛 임진왜란때의 전장터에 기념비를 세우게 됐다. 각 고등학교 학생대표의 추모사, 민의원 의장이었던 곽상훈씨의 추모사 등이 준비됐다.
박 의사의 행적은 워낙 일 자체가 비밀을 요했고 비밀결사조직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자료가 희박할 뿐 아니라 구전되는 자취조차 수집하기 매우 어렵게 되어있다. 다만 일제당시 고등계형사로 있던 한국인이 펴낸 「고등경찰비사」라는 자료와 요행히 일본어로 남아있는 박 의사의 예심판사조서가 유일한 흔적이다.
울산시 송정동에 있는 박 의사의 생가는 상당히 오래된 고가의 모습을 아직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요즘 형편 같아서는 이 집조차 제대로 보존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날로 그 위용의 도를 더해 가는 공장의 탑 그늘 속에서 오늘의 울산시민 뿐만 아니라 여타지방에서도 박상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있다.
그러나 일선교사를 비롯한 교육관계자 및 일부 젊은층에서는 어떻게든지 「울산의 얼」을 되살려야 한다는 명분아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청의 조홍제 중등교육계장은 교육자료를 편찬했고 .일선 교사들은 장래 울산의 주인이 될 학생에게 선열의 장거를 새삼 깨우쳐 주고 있다.
공업도시 울산이 낳은 유일한 의사 박상진 의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이제 젊은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울산=장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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