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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구석기시대 유물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인류의 과거를 캐려는 고고학의 노력은 하루하루 인류의 역사를 바꿔써갈만큼 새로운 발견들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년의 연륜을 쌓았을 뿐이나 그성과는 괄목할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64년 처음으로 공주석장리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될 초기만 하더라도『역사만년』의 추정에 대하여 학계는 경탄과 의아를 동시에 표했었다. 그것은 종래 2, 3천년전의 신석기시대문화와 5천년의 단군신화에 비하여 비약적인 소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장리유적의 발굴이 수년간 계속되면서 방사선탄소년대측정에 의하여 3만년전이라는 연대가 산출됐었다.
그리고 74년 제천 점말동굴의 혈거유적은 1만3천여년전이란 연대가 나왔고, 77년에 발굴된 청주빌레못동굴은 7, 8만년전의 혈거유적임을 밝혀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개가는 작년부터 발굴되고 있는 연천군전곡리 구석기 유적이다. 이곳에선 한반도에도 30만년전부터 사람이 살았었다는 자료를 보여준 까닭이다.
30만년 전의 사람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조상이라 보기 어려운 구인류다. 중국 주구점에서 발견된 직립원인과 같은 사람들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인류문화발달의 제일 앞단계인 타제석기다. 돌과 돌을 부딪치게 함으로써 날을 세워 사용한 시대이며 찍개칼(초핑·돌)찍개(초퍼)밀개(스크래퍼)주먹도끼등이 바로 그러한 도구들이다.
그밖에 짐승의 뼈와 나무 막대기로 연장으로 사용됐겠으나 그것들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전곡리 유적에서는 특히 주먹도끼(핸드 액스·양면핵석기)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먹도끼는 돌의 가장자리 전부에 양면으로 날을 세운 다목적용 석기로 동양에선 아직 발견된바 없는 것이라고한다.
즉 한·중·일을 포함한 동남아는 「초퍼」문화권으로 인식돼왔는데,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유럽」, 특히「프랑스」에서 자주 발견되는「아슐리안」문화의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고고학계의 성과가 이같이 큰 진전을 보일 때 일수록 몇가지 아쉬움이 표명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러한 조사연구는 종래 개인적 차원에서만 행해지고 또 그 결과조차 충분히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득한 구석기시대의 발굴에는 지질학·고생물학·물리학·화학·민속학 등의 연구 방법이 두루 활용되어야하는데, 인접과학과의 유대는커녕 몇몇 안되는 같은 분야 연구인 사이에도 상호협조가 부족한 느낌이다. 이점 금년도 전곡리 발굴에 6개대학과 국립박물관이 함께 참여하여 공동발굴단을 구성한 것은 일보 진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남북한 학술자료의 원활한 교환문제다. 63년 북한에서 있었던 웅기군굴포리 후기 구석기 유적 발굴보고서는 그동안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입수하고 있는 터이나 72년이래 대동강유역 덕천에서 나온 20만∼15만년전의「네안데르탈」인 계통과「호모-사피언스」계통의 인골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의 학계가 아무런 자료도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선진외국에서는 새로운 유적 탐색이 「컴퓨터」「레이다」 핵탐지기등 놀라운 기술이 개발돼 세계적인 발굴「붐」을 일으키고 있다하나 우리의 실정으로는 모두 요원한 얘기다.
우리는 지금 초보적 연구 단계이니만큼 후대학자들의 발굴을 위해 유적의 상당부분을 남기는 여유를 보여야 할 것이며 또 보존책도 구체적으로 강구해야 할 것이다. 역사와 그 연구작업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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