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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사건의 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율산계열의 병리가 노출되면서 이나라 금융과 경제, 그리고 고율수출에 따른 고도성장의 빛이 얼마나 깊은 그늘을 심층에 심어 놓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이 단순한 율산계열 경영주의 부조리·탐욕·반사회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은행 경영자의 무지와 비리에 기인되었다고 간주하려는 태도도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업주의 탐욕이나 관련은행의 무지 또는 비리만이 결합되어 가지고서는 그렇게 큰 덩어리의 문제가 그렇게 단시일내에 이루어 질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어딘가 진실한 문제점이 숨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지엽적인 책임문제 때문에 호도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율산계열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나라 경제계의 본질적 속성이 전형적으로 노출된 경우라 하겠으며, 때문에 그러한 본질적 속성을 어떻게 정리해 나감으로써 이 나라의 경제체질을 정당화시켜 나갈 것이냐하는 각도에서 다뤄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선 어떠한 난관을 무릅쓰고라도 수출은 고율로 신장되어야 한다는 명제의 필연적인 부산물이 율산사건임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면 무조건 지원할 수 밖에 없는 수출금융지원제도는 문제의 본질적인 모태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국내유동성 규제대상에서 빠진 한계없는 지원, 그 자체가 이미 악용의 내적인 소지를 형성한 것이다.
다음으로 대표적인 수출상이 이른바 정부가 지정한 종합상사다. 국내에 10여개 밖에 없는 종합상사가 수출의 대종을 맡아야 한다는 정책적인 가정과 종합상사가 계열기업화해서 중소기업을 산하에 넣어 종적인 수출력을 확보해야한다는 것이 또하나의 정책적인 가정이었다. 그 결과 종합상사가 무역금융의 도매업자로 등장했고, 이를 계열기업에 전대하는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체계 때문에 결국「문어발」경영이 되었고 부실기업을 직접 흡수하는 과정이 형성되어 금융의 누적적인 증가를 파생시켰다.
또 금융정책의 급변으로 기업자금계획이 예상밖으로 움직이게 된것도 문제를 조기에 노출시킨 원인이다. 수출 선수금제도,「스탠드바이」신용, D/A제도의 확대등 금융「채널」을 한껏 늘려 주었다가 이를 갑자기 금지, 또는 수축시킴으로써 자금은 필연적으로 모자라게 되어있다. 이러한 정책의 소산으로 구제금융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번 사건의 뿌리는 하나는 이 사건의 제도적인 모순에 기인되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율산과 금융기관의 사회적책임문제다.
이들 두가지 문제는 엄격히 구분해서 다뤄나감으로써 혼동하는 일이없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현행정책체계의 모순과 그 모순을 시정해 나갈 때 파생되는 문제점들을 결코 감정적으로 다뤄서는 아니될 것이다. 특히 당부하고자하는 바는 현행제도의 본질적 모순이 크다는 사실과 그것을 단시일에 제거하려고 할 때, 파생되는 여파를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순의 제거를 지나치게 서두르다가는 수출을 통한 고율성장이라는 이 나라정책의 뼈대가 스스로 허물어질 수도 있음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율산계열의 소행이나 방만한 금융지원의 책임문제는 그 나름대로 철저히 추궁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 특히 종합상사의「이미지」나 국내금융기관의「이미지」가 대외적으로 나쁘게 선전되는 일이 없도록 처리되어야할 것이다.
사건처리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 시끄러운 태도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여 부조리는 엄중히 도려내되, 냉정하고, 시끄럽지 않게 처리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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