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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건설 경쟁력 기초부터 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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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이라크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한편에선 1천억달러에 이르리란 전후(戰後)복구사업을 놓고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건설교통부도 중동 진출 건설업체들과 이 지역 공사관리와 복구사업 참여 방안을 논의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 이후 복구사업에 국내 건설업체의 참여가 저조했던 점에 비춰 한계가 있으리란 지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재룡 수석 연구원은 "복구사업 참여는 희망사항일 뿐 가능성은 작다"고 진단했다.

복구사업이 주로 미국과 영국 등 전쟁 수행국 중심으로 이뤄지리란 국제 역학관계도 있지만 국내 건설업이 시공력 이외에는 자금조달이나 기술력 측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비 기술력 67%'.

건설교통부가 지난해 말 평가한 건설업의 현주소다. 국내 건설업은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고도성장을 거듭하면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때 20%를 넘었다.

그러나 외형 성장에도 불구하고 부가가치 창출이 적고 국제경쟁력도 뒤처진 상태로 사양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시장이 위축되면서 건설업은 98년부터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14.8%로 떨어졌다. 해외 건설시장 점유율도 80년 7.6%에서 99년 2.3%로 낮아졌다.

◇기술 수준 제자리 걸음=국내 건설업은 기술개발보다 저임금을 바탕으로 단순 시공 위주의 외형 성장에 주력했다.

중동 건설 붐으로 80년대 초반 해외건설 수주액이 1백억달러를 넘기도 했지만 싼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한 결과였으며, 소극적 시장개척에 안주하면서 기술개발엔 실패했다.

특히 프로젝트 개발, 기획, 타당성 조사, 설계 및 유지 관리 등 소프트 웨어 분야의 기술력과 자금조달 능력이 부족하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해외건설 시장은 매해 5%씩 성장하는데도 한국 업체의 해외수주 물량은 계속 줄고 있다.

전문.일반 건설업으로 나눠 진입을 막고 여전한 하도급에 나눠먹기식 입찰이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다. 공공 공사든 민간 공사든 기술력보다는 안면이 통했다.

그 결과 노동집약적인 분야는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 자리를 내주고, 기술력이 요구되는 분야는 선진국에 밀리고 있다. 경부고속철도(벡텔)와 인천국제공항(파슨스.터너) 등 대형 국책사업의 엔지니어링 시장마저 외국 기업에 빼앗기는 형편이다.

◇이제 단순 시공으론 안 통해=조립 중심의 단순 시공보다 복합적인 종합관리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기획과 설계.엔지니어링, 금융조달 능력과 대외신인도로 승부해야 한다.

도하개발 어젠다의 출범으로 건설 분야에도 국제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드세지고 있다. 외국 업체의 국내시장 참여를 어렵게 하는 업역(業域)제한과 입.낙찰 제도를 고집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기술무역 장벽 협정과 국제표준(ISO)이 강화됨에 따라 유럽연합은 건설 재료와 구조를 유로 코드로 단일화할 움직임이다. 미국과 일본도 기술 기준의 국제 표준화와 성능 기준화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재료.구조(콘크리트.강구조) 및 시설물(도로.하천 등) 기준이 뒤섞여 있다. 선진국 기준을 채택하고 국제 표준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잘못 해석하거나 서로 엇갈리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건설업은 3D에 막노동?=젊은층이 건설현장을 기피해 숙련된 기능인력이 부족하다. 40세 이상 현장 근로자 비중이 97년 47.6%에서 지난해 60.2%로 높아졌다.

고급 기술 분야는 기술자의 전문성이 부족하고 타당성 조사 및 기본설계 능력이 취약하다.

건설업을 막노동으로 보는 사회적 시각에 기술.직무수행 능력 변화에 맞춘 교육훈련이나 자격제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장 위주의 교육훈련과 자격검정 기준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기술인력 수급 실태 조사나 데이터베이스(DB)화 작업도 초보 단계다. 기술인력 등록제도에 따른 전문인력 수급 실태 조사는 매해 배출되는 인력에 한정돼 있다. 따라서 전문인력에 대한 직종별 장.단기 수급 예측이 어렵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건설업이 위축되는 경우도 나타난다. 기초자재인 골재는 환경규제 강화와 지역주민의 반대에 따른 채취 허가 기피로 공급부족 현상을 빚고 있다.

건설시장 진입 규제를 완화하고, 부실업체에 대한 퇴출 장치가 미흡해 건설업체가 급증한 가운데 업계 전반의 경영 여건은 나빠지고 있다.

특히 공사 수행능력도 없이 일시적으로 등록요건만 갖춘 부실업체가 난립해 우량 건설업체의 몫을 잠식하면서 건실한 업체마저 동반 부실화할 가능성도 있다.

◇공개경쟁이냐, 운찰(運札)제냐=전문가들은 건설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상당 부분의 요인이 발주와 입찰계약 제도 탓으로 본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및 관련 회계 예규에 따른 획일적인 공사발주와 입찰계약 제도는 발주자의 재량이나 발주 공사의 특성을 무시함으로써 건설업체가 스스로 기술력을 높이는 노력을 할 이유가 없도록 만든다는 것.

적격심사제도에 의존하는 입찰이 대부분 요행에 의한 복권 당첨식으로 '운찰(運札)제라고 불릴 정도다.

1천억원 이상 공사에 적용하는 최저가 낙찰제 또한 공제조합에 의한 건설보증과 연대보증 위주의 의례적인 보증 관행 때문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글로벌스탠더드가 살 길=국내에서도 세계적 기준에 맞는 방법으로 발주하고 생산하는 체제로 가야 국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발주자가 공사발주 방법 등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발주 방식을 바꿔야 한다. 아울러 시공 부문의 중층화, 즉 전문건설업과 일반건설업이 분리된 업역 구분도 없애야 한다."(국토연구원 김재영 선임 연구위원)

"세계 건설시장에서 신산업 프로젝트와 개.보수 분야는 꾸준히 늘어날 것이므로 선진 설계 기술과 노하우 등을 축적하기 위한 지원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우선 건설업체들이 국제 경쟁을 국내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정부가 먼저 나서서 입찰 제도나 발주 관행을 국제 기준에 맞춰 바꿔야 한다."(건설산업연구원 이상호 연구위원)

"기술 경쟁을 유도하도록 발주 방식을 바꾸고 생산체계도 시장경쟁 원리에 입각해 새로 짜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건설업체에 대한 신용평가와 건설업체의 성과물에 대한 사후평가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또 건설보증과 건설능력 평가 제도를 개선해 발주자가 업체를 알고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아주대 신동우 교수)

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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