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제품과 값 비슷하네 … 이 참에 수입명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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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국산 가전업체들이 고가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수입 가전제품들이 잘 팔리고 있다. 국산차와의 가격차가 줄면서 수입차 판매가 급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왼쪽부터 독일 밀레의 드럼세탁기, 미국 월풀의 양문형 냉장고, 프랑스 디트리쉬의 인덕션 전기레인지가 장착된 전기오븐. [사진 롯데백화점]

독일 명품 가전 밀레의 한국법인 밀레코리아는 이달 초 자사 냉장고 100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에 실어 인천공항으로 긴급 공수했다. 대당 운송비만 30만원이 들었다. 한국 내 재고가 바닥났는데 주문은 밀려들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냉장고뿐 아니다. 올 들어 세탁기는 두 차례, 진공청소기는 네 차례나 비행기로 실어날랐다. 원래는 함부르크항에서 뱃길로 6주 이상 걸려 수입해오는 제품들이다. 밀레코리아 안규문 대표는 “독일 본사에서 비행기 수송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한국 고객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해외 명품 가전제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올 들어 삼성전자 등 국내 가전업체들이 고가의 프리미엄 가전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그간 ‘수입명품’을 사고 싶어도 값이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낸 소비자들이 이제는 비슷한 가격의 국산제품을 사느니 수입명품을 사보자고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른바 국내 제조사들의 프리미엄 마케팅의 역설(逆說)인 셈이다.

 수입차 시장은 지난해부터 이미 이런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쏘나타 가격이 3000만원, 그랜저가 4000만원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는 최근 최고 7000만원에 달하는 신형 제네시스를 출시하면서 프리미엄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그러자 폴크스바겐 골프, BMW 5시리즈 등 외제차 수입이 급증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수입차 점유율은 지난해 12.1%에 달했고, 올 들어 4월 말까지는 13.79%로 치솟았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명품가전의 본거지는 강남지역이다. 롯데백화점 서울 잠실점 가전매장이 대표적이다. 세탁기의 경우 10㎏ 용량의 밀레 드럼세탁기(258만원) 매출이 올 1~4월에 전년 대비 36%나 늘었다. 냉장고는 750L 안팎의 월풀 양문형(300만~400만원)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0% 가까이 급신장했다. 전자레인지 제품은 건강 이슈까지 겹치면서 외국 명품의 매출이 급등한 경우다. 롯데백화점 잠실점 전자·가스레인지 매장은 올 들어 4월까지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7% 신장했는데, 이 중 전자레인지 비중이 70%를 차지했다. 인덕션 제품은 3구짜리가 최고 500만원이 넘어 가스레인지(30만원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찾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올 들어 해외에서 산 경험이 있는 40대 주부들을 중심으로 외국 명품 가전을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 명품가전 돌풍의 불쏘시개가 돼준 것은 역설적으로 국산 가전제품들이다.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부문은 올 초부터 프리미엄 가전에 주력하고 있다. 올 3월 출시한 ‘수퍼프리미엄급’ 냉장고 셰프컬럭션은 최고 739만원에 달해 월풀의 최고가 제품(854만원)과 큰 차이가 없다. 이달 초 출시한 프리미엄 청소기 ‘모션싱크 워터클린’은 99만원으로, 기존 일반 진공청소기(30만원 이하)의 세 배가 넘는다. LG전자 역시 올 들어 미국과 러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성능과 가격대를 올린 프리미엄 가전제품들을 내놓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트분석센터의 전미영 연구교수는 “국내업체들이 프리미엄제품으로 가격을 올려 국산-수입 간 가격차가 줄어드니 그간 잠재해 있던 외제 명품 소비에 대한 심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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