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줏대 있는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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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핀란드 사람에게 들은 농담이다. 여러 나라 사람을 모아 놓고 코끼리에 관한 책을 쓰게 한다. 그러면 프랑스 사람은 '코끼리의 삶과 사랑'이라는 철학적인 책을 쓰고, 독일 사람은 '코끼리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과학적인 책을 쓴다. 미국 사람은 '코끼리를 이용하여 돈 버는 법'이라는 책을 쓴다. 그런데 핀란드 사람은 '코끼리는 핀란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책을 쓴다는 것이다.

지금은 가장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지만,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1809년까지 스웨덴에 600여 년, 1809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에 100여 년간 식민 지배를 받으며 강대국의 그늘에서 살아 왔다. 그래서 핀란드인은 남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고, 이 코끼리 이야기는 이것을 자조적으로 비꼰 농담이다.

이렇게 강대국 틈에 끼어살다 보니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져 핀란드는 30년대부터 93년 유럽연합(EU) 가입 때까지 외국인 지분이 20% 이상 되는 모든 기업을 공식적으로 '위험 기업'으로 분류, 특별관리 하는 등 외국자본에 대단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강대국 틈에 끼어 어렵게 살아 온 우리 민족에게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강대국을 선망하고 그 눈치를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했다. 핀란드 정도는 아니지만 외국인 투자를 심하게 제한하였고, 유치산업 육성을 위해 관세와 보조금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93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선언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결정을 계기로 경제민족주의는 후진적인 이데올로기로 폄하되기 시작하였고, 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완전 개방이 금과옥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이루어진 무조건적인 개방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최근 들어 우리 정부가 뒤늦게나마 최소한의 시정조치를 취하려 하자 외국계 자본과 이들을 대변하는 외국 유수의 경제지들이 나서서 이것이 죽은 줄 알았던 경제민족주의의 부활이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영국의 유력 경제지인 파이낸셜 타임스가 물고 늘어져 문제가 된 증권거래법 중 소위 '5% 보고 제도'의 개정은 주요 주주의 자금 출처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려 한 조치로 자본의 국적과는 무관한 제도며, 미국.영국 등 많은 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제도다. 이를 비판한다면 내외국인의 동등한 대우를 넘어 외국인에 대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인가?

우리 정부가 이러한 부당한 불평에 단호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해 금감위에서 거론하였던 은행 이사의 국적 제한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역사적으로 미국 등 많은 나라가 사용하였고, 지금도 스웨덴.스위스 등 여러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경부는 이런 제도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세계화의 흐름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로 국경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선진국들의 경제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신화다. 선진국들은 자기가 많이 가지고 있는 자본의 국제이동을 원할 때는 국경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후진국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노동의 이동 문제가 나오면 국경이 필요하다고 한다. 국가 안보, 공공 질서, 지역 균형발전 등을 핑계로 외국인 투자 규제도 많이 한다. 후진국들이 제조업체에 보조금을 주는 것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취약한 농업 부문에 있어서는 1년에 1조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러한 선진국의 경제민족주의가 엄존하는데 우리만 '순수한' 세계주의자 행세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경제 규모를 보면 이제 세계 10위권에 든 나라가 계속 주눅들어 '코끼리'를 걱정하며 살아야 할까? 외국자본이라고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필요한 외국인 차별은 할 수 있는 줏대있는 세계화를 해야 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