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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국가상비군 한 달 … "생활 단조로워져 집중 잘돼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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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창호(가운데) 9단이 지난 11일 강릉 라카이 리조트에서 제19회 LG배 세계대회 16강전을 국가상비군과 함께 검토하고 있다. [사진 사이버오로]

“그냥 걷지.” 이창호 국수의 덤덤한 말투에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19회 LG배 세계대회 32강전이 열린 지난 9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라카이 리조트(Lakai Resort) 2동 265호실. 바둑 국가상비군 훈련 현장이다. 젊은 기사들이 감독 유창혁(48) 9단과 기술위원 이창호(39) 9단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 대국에서 질 때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죠.

 “그냥 걷죠. 별다른 수가 없어요.”(이창호)

 -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죠.

 “납득할 때까지 연구하고, 연구하며 답을 찾아야죠.”(목진석·34·9단)

 “승패를 잊고 내용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이창호)

 - 매너리즘에 빠질 때 어떻게 극복합니까.

 “그렇다고 잘 두는 사람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유창혁)

 국가상비군은 그렇게 선후배 간의 대화로 강릉 전지훈련(8~12일)을 마무리했다. 훈련은 다채로웠다. 오대산 국립공원 내 계방산을 올랐고. LG배 32강전과 16강전도 검토했다. 한 수 10초 속기 대회도 열어 손맛도 톡톡히 봤다. 목 9단과 조한승(32) 9단은 늦은 밤에 5㎞ 떨어진 대형마트까지 다녀왔다. 견과류와 과일 등 간식거리를 사와 후배들의 건강을 챙겼다.

 훈련은 만만치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라고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오전 7시30분 식사에 지각한 늦잠꾸러기도 있었고,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힘들어하는 내성적인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훈련은 진행됐고 상비군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국가상비군이 출범한 건 지난달 7일. 어느덧 한 달이 넘게 흘렀다. 젊은 기사들은 잘 적응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바둑기사들은 묶이는 것을 싫어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편이다.

 “정말 그렇게까지 훈련해야 하는 건가요?” 유 감독에게 상비군에 뽑힌 후배들이 하나같이 던졌던 질문이다. 남녀 A·B·C 3개팀 총 30명으로 구성된 상비군은 매주 월~금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함께 연구한다. 중국·일본과의 자존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다. 중국에는 ‘국가대표팀’이, 일본에는 ‘고고재팬’이 있다.

 빡빡한 훈련 일정에 불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중국에 밀리는 가장 큰 원인은 기사들의 적은 공부” 때문이라는 유 감독의 판단에 기사들이 점차 공감하는 모양새다. 이른 아침 출근과 늦은 저녁 퇴근이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공감대도 높아졌지만 동질감이 커진 것이 더 큰 힘”이라는 전력분석관 김성룡(38) 9단은 기사들의 자발성에 큰 기대를 표했다.

 젊은 기사들의 소감을 들어봤다.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있지요. 그러나 점점 밝아지고 있습니다.” 18일 오후 1시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4층에서 만난 국가상비군 B팀 한태희(21) 4단의 말이다. C팀의 오정아(21) 2단은 “고수들과의 대국 기회가 많은 것이 고마워서 공부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겸양이나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기사들이 절제를 배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지현(22) 4단은 “(일주일 내내 기원에 나오는 까닭에) 생활이 점차 단조롭게 되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오정아 2단도 “맞아요, 잘 몰랐는데 규칙적인 생활의 즐거움을 알겠어요”라고 거들었다.

 국가상비군은 점점 거세지는 중국 바둑을 넘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이다. 한국 바둑에서 볼 수 없었던 실험이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것에 불과하지만 한국 바둑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였다. 이지현 4단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생활이 점차 단순하게 되는 게 좋습니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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