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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세계 어린이의 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학교 공부가 끝났는데도 용이는 한쪽 끈이 끊어진 가방을 맨채 학교 앞 가게를 기웃거리며 마냥 서성대고 있읍니다.
주머니 속에 든 일백원으로 떡볶이를 사먹을까, 딱지를 살까, 경주용 자동차를 살까 한참 생각하다가 구슬을 샀읍니다.
쉰개에다 덤으로 세개를 받으니 양쪽 주머니가 불룩합니다.
짤랑거리는 소리에 신이 나서 빨리 뛰어보다가 시무룩해져 다시 느릿느릿 걷습니다.
아침에 엄마가
『용아, 학교 끝나는 대로 치과엘 가자.』
하셨던 생각을 하면 집에까지 가는 길이 얼마든지 멀었으면 좋겠읍니다. 용이는 한번도 칫과에 가본 적이 없읍니다.
그렇지만 용이의 반에는 칫과에 가서 이를 빼고 온 동무들이 여럿 있어서 용이는 치과에서 잇몸에 주사를 놓고 집게로 사정없이 뽑아낸다는 것을 압니다.
더우기 엄마가 손가락으로 흔들다가 이빨 뿌리가 너무 깊은가보다, 칫과엘 가서 뽑아야지, 하셨으니 얼마나 아플까요.
용이는 만화가게 진열장에 꽂힌 만화책의 표지를 차례로 다 읽었읍니다. 장난감 가게를 들여다보다가 주인이 나오며
『뭘 사려고 하니?』
하는 바람에 냉큼 물러섰습니다. 한껏 느림보 걸음을 하는데도 곧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입니다.
용이는 길 모퉁이에 있는 라이터와 만년필, 손톱깎이 등을 파는 노점 앞에 멈춰섰읍니다. 그 옆에 전에는 못 보던 신 깁는 할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구두에 징을 박던 할아버지가 용이를 불렀습니다. 할아버지의 옆에는 사내아이가 앉아 구두에 약을 바르고 헌겊으로 반짝반짝 광을 내고 있읍니다.
벌써 여러 켤레의 구두가 나란히 반짝반짝 햇빛에 빛나고 있읍니다.
『이리 온, 개구장이야. 가방 끈이 끊어졌구나.』
가방끈이 끊어졌구나, 사내아이가 할아버지의 말을 흉내 내었읍니다.
할아버지는 굵은 철사를 끊어 금방 용이의 가방끈을 이어주었습니다. 용이는가방을 메고 할아버지 앞에 쪼그려 앉았읍니다.
굵은 바늘로 쑥쑥. 벌어진 곳을 깁고 뚝딱뚝딱 못을 박은 뒤 옆에 앉은 아이가 반짝반짝 닦으면 금새 새 구두가 되는 것이 신기합니다.
『술아, 이 걸 갖다주고 와야겠다.』
할아버지가 쓰고 있던 돋보기를 벗고 고친 구두를 들고 일어났읍니다.
『꼬마야. 뭘 보니?』
구두를 닦던 아이가 말했읍니다. 꼬마라니, 용이는 좀 기분이 상했읍니다. 술이는 할아버지가 벗어 놓은 돋보기를 콧등에 걸치고 땅바닥을 들여다봅니다.
『이걸 쓰면 뭣이든지 아주 크게 보인다. 봐라, 개미는 다리가 여덟 개나 되고 더듬이가 있다.』
용이는 같이 땅바닥을 들여다 봅니다.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개미의 다리와 더듬이는 잘 보입니다.
『치이, 현미경으로 보면 더 잘 보인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넌 학교 안 다니니? 난 일학년이야.』
『난 여기저기 안 다녀본 데가 없어.』
술이는 추운지 목을 으쓱 움추렸읍니다.
용이는 갑자기 집에서 기다리고 계실 엄마 생각이 났읍니다. 그러자 또 이가 아파와 얼굴을 찡그렸읍니다.
『왜 그러니?』
『이가 아파.』
『넌 지금 쓸쓸하니? 난 언제든지 쓸쓸해지면 이가 아프더라.』
『쓸쓸한 게 어떤 거니?』
『응, 그건 배가 고픈 거와 비슷해. 난 밤에는 자주 이가 아프단다. 호박잎을 씹어 봤니?할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어. 길을 가다가 이가 아프면 호박잎을 뜯어준단다. 그걸 입에 물면 감쪽같이 낫거든.』
용이의 눈이 동그래졌읍니다.
술이는 할아버지가 의자처럼 깔고 앉았던 트렁크를 열었읍니다. 용이는 바싹 다가가 술이와 머리를 맞대고 트렁크 속을 들여다 보았읍니다. 헌 옷가지들을 들추자 크고 작은 병들과 조그만 나팔, 손풍금 따위들이 가득 들어있었읍니다.
『이게 다 뭐니?
『우리 재산이란다. 할아버지와 나는 어디든지 다니지. 이렇게 신을 고치는 일은 별로 없어. 약을 팔거든. 할아버지는 무슨 약이든 다 만들 수 있으니까.』
술이는 나팔을 꺼내 입에 대고 불었읍니다. 삐익 큰 소리가 나자 깜짝 놀라 나팔을 입에서 떼고 뿜빠뿜빠 나팔부는 시늉만 해 보였읍니다.
『이게 그 약이니?』
『만지지 마. 그건 아이들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는 약이야. 무슨 약이든 다 만들 수 있다니까. 배 앓이도, 기침도 다 낫는다. 넌 이가 자꾸 아프니?』
용이는 고개를 끄덕였읍니다.
술이가 트렁크에 손을 넣어 더듬더니 조그만 헌겊주머니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씩 속에 든 것을 꺼냈읍니다.
『모두 내 꺼야.』
조그만 쪽 거울, 계급장, 끈이 달린 옛날 회중시계가 나왔읍니다. 술이는 다음에 조그맣고 하얀 모래 같은 것을 내놓았읍니다.
『며칠 전에 뽑은 내 이야.』
『이빨을 잃어버리면 새 이가 안난대. 지붕 위에 던져 놓아야 까치가 물어가서 새걸로 갖다 주는거래.』
『아니야, 눈이 녹으면 큰 나무 밑에 잘 묻어 둘거야. 나무에 싹이 틀 무렵이면 새 이가 나는 거라고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그래서 이렇게 넣어둔 거야. 만져봐, 아주 딱딱해.』
용이는 손을 내밀려다 꼭 주먹을 쥐었읍니다.
『어떻게 뽑았니? 아프지 않았니?』
『난 벌써 여러개 째야. 하나도 안 아파.』
술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색실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세겹으로 만들어 한 끝을 용이의 흔들리는 앞니에 묶고 다른 한 끝을 잡았읍니다.
『이제,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를 해봐.』
용이가「무궁화꽃」이라고 했을 때 술이가 세게 실을 잡아당기자 어느새 실 끝에 조그만 이빨이 매달려 나왔읍니다.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읍니다. 용이는 뽑은 이를 주머니에 넣었읍니다.
『너는 언제 다른데로 가니?』
『그건 비밀이야. 깜깜한 밤중에 누군가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이제 떠납시다 하고. 그럼 날이 밝기 전에 떠나는거야.』
용이는 일어났읍니다. 이젠 칫과에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꾸지 않을래? 내 걸 줄께.』
용이는 조금 망설입니다.
『난 애들을 만나면 친구가 됐다는 표시로 꼭 그렇게 한단다. 봐라, 여기 새로 난 이빨 네개가 모두 친구들의 것이야.』
정말 술이는 네 개의 이가 가지런히 나 있었읍니다.
『그럼 꼭 나무 밑에 잘 묻어 주겠니 ?』
『너도 꼭 지붕 위에 던져줘야 해. 내 이가 비뚜로 나지 않게 발을 모으고 말이야. 난 물론 네게 예쁜 이가 나도록 잘 묻어줄 테지만….』
『나무에 싹이 트면 꼭 새 이가 나는 거지?』
용이는 술이의 이를 받아 소중히 주머니에 넣었읍니다.
『이제 너는 내 다섯 번 째 친구야. 우린 영원한 친구가 된 거란다. 다른 곳으로 떠날 때 늬네 집 앞을 휘파람을 불면서 지나갈께, 난 친구들의 집을 지날 땐 꼭 그렇게 하니까.』
다음날 새벽 용이는 창문이 조용히 흔들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바람이 부는 걸까. 용이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새벽의 푸르름 속에 바람이 휘파람 소리처럼 가득 거리를 채우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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