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전문가 진단-미국의 새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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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이라크 전쟁이 3주일째로 접어들었다. 지난달 20일 시작된 전쟁은 첫날부터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연합군은 가공할 화력으로 바그다드를 대대적으로 공습하는 대신 F-117 스텔스 전투기 2대와 크루즈 미사일 40발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비밀벙커를 폭격하는 것으로 첫 공격을 마감했다.

미국은 이 폭격을 '후세인 참수공격(斬首攻擊.Decapitation Attack)'- 문자 그대로 후세인의 목을 자르는 공격이라고 묘사했다. 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전격작전이다.

*** 점령 없이 바그다드로 직행

클라우제비츠로 대표되는 서양의 전쟁 철학은 "전쟁이란 적의 저항 의지를 꺾음으로써 승리하는 것이며, 적의 의지를 꺾으려면 적의 군사력을 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전쟁은 이같은 패러다임이 철저히 바뀌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보유한 군사력의 핵심인 공화국수비대를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종전 후 후세인 정권이 여전히 건재하고, 오히려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해가자 미국은 전략을 바꿨다.

독재국가와 전쟁할 경우엔 군사력 대신 그 나라의 지도자를 개전 초부터 집중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9.11 테러는 이같은 새 전략, 즉 국가보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후세인 등 개인이 공격목표라는 인식에 힘을 실어줬다. 이번 전쟁은 그 전략을 최초로 현실에 적용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개전 당시 연합군 병력은 미군과 영국군을 다 합쳐도 30만명에 못 미쳤다.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전쟁을 개시한 것부터가 새로운 전략에 입각한 것이다.

연합군은 바그다드까지 곧장 진격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따라서 이번 전쟁에서 '점령'이란 개념은 없다. 국토 면적이 남한의 4.5배나 되고 병력이 40만명에 달하는 나라를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이 정도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은 공격 개시 40시간 만에 5백km를 진격했다. 남부 거점 도시 바스라는 그냥 건너뛰었다. 연합군의 병참선은 당연히 길게 늘어졌고, 그 일부를 이라크 민병대가 공격함으로써 후방지역에서 교착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9일 현재 미군은 바그다드에서 이라크군의 저항을 대부분 물리치고 티그리스강 서안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개전 이래 이라크군이 연합군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공화국수비대와 민병대가 연합군을 산발적으로 공격하긴 했으나 이라크군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전개된 작전은 아니었다.

개전 나흘 만인 지난달 24일 바그다드 중심부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지만 이라크군의 대공포 사격도, 공습경고 사이렌도 없었다. 이미 이라크 지휘부가 마비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후세인 대통령의 생존 여부는 별 의미가 없다. 미국이 후세인의 지휘체계를 마비시켜 그가 건재하더라도 군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5, 6일 벌어진 바그다드 시가전은 이라크군 전사자가 2천~3천명에 달한 반면 미국 측 전사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을 만큼 일방적이었다.

이라크군은 미군이 눈에 들어와야만 공격할 수 있었지만 미군은 첨단장비로 이라크군의 소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마음껏 적진을 유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이라크군 지휘부가 와해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 첨단 장비로 적진 손금 보듯

결국 미국의 새 전략-지휘부 우선 제거-이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쿠웨이트 점령에 목표를 한정했던 걸프전은 43일간의 폭격과 1백시간의 지상전을 통해 종결됐으니 '7주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쟁은 그보다 훨씬 넓은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큼 3개월 안에 끝난다면 '단기전'으로 부르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 전쟁은 종전 후의 파급효과라는 측면에서도 유례 없는 충격을 초래할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전쟁 발발 전인 지난달 9일 이 전쟁이 '세계질서 재편 전쟁'(World Reordering War) 이 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라크전의 '손쉬운 승리'는 앞으로 미국이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군사력 사용의 문턱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춘근 <정치학 박사(전쟁론).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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