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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에 귀국한 재미교포|혈육찾아 헤매다 기진맥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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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0년만에 밟은 고향땅에서조차 안식처가 없다. 일제때 일본군에 징용당해 반세기에 달하는 긴 세월을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80대 백발노인이 고국에 돌아왔다. 가족은 물론 친구도, 당시의 이웃도 찾을 길이 없다.
펑생 총각으로 지냈다는 강왕조할아버지 (82) 는 5월중순께 미국에서 귀국한후 6개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친지를 찾았으나 허탕. 경기도안양시안양4동692의7 안전여인숙 (주인김치지·47) 1호실에서 지친몸을 가누고 있다 강할아버지의 인생역정을 전해들은 경기은행 안양지점행원 안정근씨(32·외환계구입)가 보호자를 자청, 보살피고 있다.
강할아버지가 일본군에 징용 당해 끌려간 것은 32세때인 1928년 봄. 고향인 경북영덕군달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아들로 태어나 14세때부터 머슴살이를 하다가 총칼을 든 일본병사들에 끌려갔었다.
아버지가 강호선씨였고 자신은 4대독자였다는 것. 뒷동산의 노송. 새벽연기가 피어오르는 고즈넉한 초가집들이 어렴풋한 기억의 전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북해도로 건너가 탄광에서 강제노동등으로 17년동안 혹사당했다. 8·15해방의 기쁨도 모른채 46년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회사인 「판암」사에 정비공으로 취직, 생계를 유지했다.
60년5월2일 정년퇴직후 18년동안은 외로움을 씹는 쓸쓸한 나날이었다. 식당·주유소등에서 품을 팔고 3류「아파트」의 싸늘한 방에서 새우잠을 자야했다.
말 한마디를 주고받을 이웃도 친구도 가정도 없이 고독을 벗하며 살아온 긴 세월이었다.
몸이 늙어가면서 더욱 간절해지는 것은 향수뿐이었다. 『뼈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야겠다』는 생각에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 3개월 동안 노구를 이끌며 고향인 경북영덕과 울산·부산·서울등지를 누비며 친지를 수소문했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지친 몸으로 8월4일 상오11시쯤 경기은행 안양지점 외환창구를 찾았다. 그동안 쓰고 남은 3백67만6천2백59원을 예금하기 위해서였다. 담당창구직원 안씨가 강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전해듣고 친아버지처럼 보살펴주기로 결심, 지금까지 시중을 들고있다.
강할아버지는 『지난봄 귀국때 김포공항에 압류당한 「소셜·시크리티」(미정부발행 사회보장제「카드」 No.577∼36∼3352)를 찾아 미대사관에 신청하면 월2백「달러」씩 받을 수 있는데…』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제는 양로원에라도 들어가 편히 쉬는 것만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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