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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이해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무대와 타산>
내가 최초로 연출을 맡았던 연극은 1949년 6월에 공연된 『도원기』였다 『도원기』는 「이탈리아」 작가 「콘체」의 원작을 김희창이 각색한 고전극이었다.
임금이 수수께끼를 내어 그것을 풀면 부마(부마=임금님의 사위)로 삼는다는 옛날 이야기 같은 연극이었다.
나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는 데다가 너무 갑작스레 연출을 맡았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더군다나, 무대장치를 월남한 박우인이 처음으로 맡았는데 그의 솜씨도 알 수 없어 출발부터 여러 가지로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불안했던 예상대로 대 참패를 보았다. 연극을 끝내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는데 공연 직전 모 창극단에서 『햇님 달님』이란 이름으로 한차례 공연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의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한 원인은 됐다.
이 연극은 부마지망생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수수께끼를 무는데 한 문제씩 풀때마다 극의 분위기를 「클라이맥스」로 고조시켜가야 하게 돼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내 실력으론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창극에선 이 대목이 용이했다. 모든 출연자들이 모두 창을 합창해 그 분위기를 쉽게 고조시켰던 것이다. 창극은 연극과는 달리 대 성황이었다.
1950년 1월에 공연된 오영진 원작의 『인생차압』은 나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로 잊혀지지 않는 연극이다.
나의 2번째 연출작품이기도 했지만 작품료 시비란 개운찮은 소동을 빚은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차압』의 원제는 『살아있는 이동생각하』다. 해방 뒤 친일파를 색출하는 반민특위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에 걸린 한 사나이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으로 가장한 인간의 고뇌와 삶의 집념을 그린 풍자극이었다.
오영진 만이 가진 천재적인 희극작가의 면모가 백분 드러난 오영진 희곡의 대표작이다.
이화삼이 주인공인 이중생으로 분했고 나는 변호사역을 맡아 출연도 하면서 연출을 보았다. 중앙극장에서 공연한 이 연극은 기대와는 달리 흥행에 큰 실패를 했다. 그때까지 「코미디·뉘앙스」에 전혀 생소했던 관객들로선 이 본격 「코미디」극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저항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인생차압』은 그 뒤 재 공연 때에는 그때마다 진가를 발휘, 성황을 이루었다.
중앙극장에서 공연할 때 잊혀지지 않는 한 관객이 있었다. 중앙극장사장 김상진의 부인이었는데 1주일 공연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극 구경을 했다. 그것도 올 때마다 꼭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와 맨 앞좌석에 앉아서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열심히 구경했던 것이다. 나는 이 연극이 『어떤 이에겐 이렇게 매력 있는 얘기가 될 수도 있구나』하고 위안으로 삼았다.
연극의 실패로 단원들의 배당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질 못했다. 이런 판국에 오영진의 작품료 소동이 빚어진 것이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조만식 선생 밑에 있던 오영진이 평양을 떠나 서울에 온 것이 1948년 정부선포직후였다. 오영진의 월남은 당시 작가가 많지 않았던 극작계를 한결 윤택하게 했다.
월남한 오영진은 서울에 오자마자 적색분자의 조직 「테러」를 당해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의 문재를 듣고있었던 나는 여러 차례 병원으로 문병을 갔고 퇴원하자 간곡한 원고 청탁을 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즉 『인생차압』은 그래서 나온 작품이었다.
『인생차압』의 공연 실패는 연출자였던 나는 물론이고 단원전체를 실망시켰다.
좋은 작품을 외면하는 대중의 변덕은 흔히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때처럼 관객이 야속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때까지 극단운영은 막을 올리는 것만이 능사일 뿐 도무지 계산이란 것을 몰랐다.
원작료 지불요구소동은 단원들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날벼락이었다.
그때서야 무대에도 계산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일깨우게 한 값진 경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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