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의 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예능 쪽에 타고난 재간이 좀 있다는 것은 이미 예기했거니와 그 소질을 버리지 않고 키우는데 남다른 정성을 쏟아 왔다. 흔히 예술을 하자면 돈이 많이 든다고 들 하지만 그리 넉넉지 못했던 내 가세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학창시절에 취미와 열성이 없었던들 늙으막에 풍월이라도 읊을 수 없었으리라.
연전 다닐 때부터 나는 학구열이 상당히 강했고 호기심도 많았던 편이다. 그때 내가 심취했던 것 가운데에는 동서양의 음악 말고도 연구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신극에 반한 나는 연전 연극부에서 활동했으며, 이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 해방 후에 우리 나라 최초의 종교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작품은 영국작가 「골드워디」의 『정의』란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노인역을 맡았다.
춘원 이광수가 번역한 대본으로 김태쇄이 연출한 이 공연은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요즘처럼 훌륭한 무대는 아니었어도 출연한 학생들의 진지한 연기 때문에 학생 극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다.
노인으로 분장한 내가 어찌나 실감나게 열연했던지 평론가 백민 씨는 『영국의「골드워디」가 이 작품을 쓸 때는 조선의 황재경을 배역으로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아마추어」배우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극찬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춘원의 한글대본과 공연장면을 찍은 사진을 작가에게 보였다. 「골드워디」가 이 사진을 받아 한참 들여다보더니 빙긋이 웃더라는 에기를 그의 비서가 대신 보내준 답장에서 읽었다. 그때의 내 기쁨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일약 유명배우가 뇐 기분이어서 그 뒤 연극회와 음악회를 더욱 부지런히 찾게 되었다. 『인생은 배우요, 세계는 무대』라지 않던가-.
내가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직접 주연배우로 활약하고 제작까지 했다면 놀랄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해방직후부터 일제하에 박해받았던 성직자의 고행을 영화로 만들어 널리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도 6년간의 옥고에도 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끝내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생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탄압 받은 주목사는 『죄 없는 죄인』이요, 우리 나라 기독교의 큰 별이었다.
주목사의 순교일생은 나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의 족적을 상세하게 더듬어 활동사진으로 재현하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제작비만도 6만4천 「달러」가 들었는데 대부분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때는 영화 「필름」이 매우 귀해서 미국의 AMG사로부터 얻어 왔다. 처음에는 전문배우에게 주목사역을 맡길까 하다가 주목사의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는데는 교인이어야 한다는 의견에 좇아 내가 맡기로 했고, 조연급은 영화인이 출연했다.
이밖에도 4백 여명의 「엑스트러」들이 나갔는데 그들도 대부분 교인들로 자진 봉사했다.
물론 지금처럼 동시녹음이 아니라 변사가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 활동사진 반, 연극 반으로 영화와 연극을 썩은 형식이었다. 그나마도 영사기가 없어서 지방순회 공연 때는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프로젝터」를 빌어 썼다.
주기철목사는 일제가 그 말기에 조선의 모든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이를 앞장서서 반대한 선봉장이었다 신사참배 강요사건은 일제하에 전국의 교인들이 모두 당했던 종교탄압이었다. 1897년 경남창원에서 태어난 주소년은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뒤, 남강 이승당장로가 세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유학했다. 이곳에서 남강·고당·춘원 등 선각자의 배움을 받은 그는 연전 상과에 입학했다가 건강이 나빠 중퇴하고 기독교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5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주기철은 30세에 졸업하자 곧 부산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이때 일제는 신사참배로 종교와 무관하다는 이유로 교회에 대해서도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주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교회(총회장 함태영목사)에, 제출하여 결의케 했고, 마산문창교회 목사를 거쳐 고당의 간곡한 청으로 1936년 평양산정재(산정재)교회에 부임했다.
1938년9월 제27차 조선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홍택기)는 예수교회의 신사참배를 의결했으나 주목사와 산청재교회는 끝내 반대했다. 일제는 주목사를 잡아 들였고 교회문에 못질을 하고 말았다. 6년간의 옥중투쟁에서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주목사는 끝내 해방의 감격도 누리지 못하고 1944년4월21일 옥중순교했다.
『죄 없는 죄인』을 영화로 만든다는 예수교야 말로 내가 갈 길 임을 새삼 깨닫게 됐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