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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선교사 유적지, 근대유산 지정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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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인요한 (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이사장이 친구들과 성경 공부를 하던 오두막집 다락방을 가리키며 걸쭉한 순천 사투리로 말했다. “제대로 못해불면 아부지한테 겁나게 혼나부렀소.” [오종찬 프리랜서]

6월 지리산은 초록의 바다다. 해발 1212m 왕시루봉에는 언뜻언뜻 연초록과 거뭇한 갈색조가 그늘을 드리운다. 떡을 찌는 시루 모양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 해 왕(王)자를 붙였듯 가파른 산길을 서너 시간 오르니 갑자기 평평한 너른 땅이 펼쳐졌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산231번지,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진 오두막 12채가 산객을 맞는다. 수십 년 이 봉우리를 지켜온 선교사 유적지다. 긴 세월 고지의 사계절을 견뎌낸 집들은 그 자체로 역사의 빛을 발한다. 나그네가 잠시 목을 축이며 걸터앉은 나무의자에 나이테와 어우러진 사람 테가 자잘하다.

 지난 3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사장 양병이)는 이 사연 많은 유적을 시민 유산으로 영구 보전하기로 결정하고 (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이사장 인요한)과 신탁협약을 체결했다. 1962년 한 선교사의 손으로 건립된 지 52년 만이다. 12일에는 문화재청 근대분과위원회 위원들이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한 현지 조사를 온다. 청정한 바람에 하늘빛과 숲 빛이 뒤섞이며 옛 이야기를 불러온다. <중앙일보 2012년 5월9일자 27면

 선친 휴 린튼(한국명 인휴·1926~84)의 뜻을 받들어 이 터를 지켜온 인요한(55) 연세대 의대 교수는 “자유와 평등,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숭고한 발자취가 살아남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1920년대 노고단 유적지에서 시작된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이 이제 한국 근대사의 한 대목을 증언해주는 역사적 장소로 재발굴되는 시간이다. 선교를 위해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풍토병에 시달리다 67명이 목숨을 잃자 그 대책으로 세운 피난처가 이 여름 수양관이다.

 한때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등 선교사들이 자신들 조국의 건축 전통에 따라 지은 집 50여 채가 있었던 노고단 시절은 6·25 전쟁으로 사라졌다. 인 이사장은 “왕시루봉 유적지가 근대 유산 등록문화재가 되면 유물 등을 정비해 박물관을 만들고 문화인류학적 사료이자 건축학적 가치를 정리해 후대가 와서 보고 배우는 살아있는 역사 현장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민초들의 삶과 한을 품어주던 지리산. 그 한 봉우리에 먼 이국땅에 자유의 혼을 뿌리러왔던 파란 눈 선교사의 발자취가 한국 근현대사의 한 줄기로 접어들고 있다.

구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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