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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후세인 돈줄 좇던 검사에게 금융개혁 맡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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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정직과 투명성이다.”

 프란치스코(사진) 교황이 지난달 말 중동 방문을 끝내고 바티칸으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한 다짐이다. 부정부패와 돈세탁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바티칸은행(종교사업기구·IOR) 관련 얘기를 하면서다. 바티칸 내 관련 경제 부서들에 이 같은 덕목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교황이 10여 일 만에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입증했다. 바로 인사(人事)를 통해서다. 5일(현지시간) 바티칸의 금융감독기구인 금융정보국(AIF)의 이사 5명을 전원 해임했다.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임명한 이들로 바티칸 사정에 정통한 이탈리아 기득권층 출신이다. 임기(2016년)가 한참 남았는데도 교황이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대신 이질적 배경의 다국적 인사 4명을 기용했다. 인적 다양성을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교황청에선 “AIF를 국제화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임 이사 중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대테러 담당 보좌관을 지낸 후안 자라테도 있다. 그는 미국 법무부에서 대테러 관련 검사로 일했고 이후엔 재무부에서 테러자금·금융범죄 담당 부차관보로 검은돈의 흐름을 좇았다. 세계 곳곳에 숨겨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검은돈 30억 달러(약 3조660억원)를 찾아내기도 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도 유사한 일을 했다. 북한 위폐 추격전에도 깊숙이 관여했고 당시 경험을 담은 『재무부의 전쟁』이란 책도 펴낸 베테랑이다.

 메릴린치와 JP모건 출신의 은행가였다가 이젠 자선 활동가로 일하는 마크 오덴달과 싱가포르에서 50년 넘게 민관을 넘나들며 일했던 J Y 필레이 전 증권거래소 이사장도 포함됐다. 2010년 AIF 신설 이후 처음으로 여성도 발탁됐는데 보험업에 정통한 마리아 비앙카다. 유일한 이탈리아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같은 조치는 르네 브뤼엘아르 현 AIF 소장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란 분석이다. 스위스 변호사 출신으로 세계적인 돈세탁 문제 전문가인 그는 2012년부터 AIF 소장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개혁 조치들을 도입했다. 실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 202건의 의심 거래를 발견했는데 전년도 6건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다. 이 중 5건은 이탈리아 수사 당국으로 넘겼는데 이 또한 전년도 1건에 비해 늘었다. 또 바티칸은행 계좌 중 1600개를 폐쇄하기도 했다. 무자격자가 개설한 것이나 제3자가 사용한 게 명백한 계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혁의 속도와 방향을 두고 브뤼엘아르 소장과 기존 이탈리아 출신 이사들이 수시로 충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브뤼엘아르 소장이 최근 “바티칸이 금융 범죄와 싸우는 수단을 마련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지만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바티칸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브뤼엘아르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이사진을 원했다”며 “교황이 브뤼엘아르를 위해 ‘올드 보이 네트워킹’을 몰아낸 것”(로이터)라고 분석했다.

 교황은 지난해에도 바티칸의 예산과 재무를 관장하는 경제사무국을 신설하고 그 수장에 이탈리아가 아닌 호주 출신의 조지 펠 추기경을 임명하는 등 개혁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조치에 대해 내부자의 말을 인용해 “보다 국제적이고 전문적인 기구로 향한 강한 전진”이라며 “(교황으로부터) 매우 강한 시그널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기뻐하는 건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강고한 기득권층이 저항할 수 있다는 얘기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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