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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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는 언제나 미소를 잊지 않고 있었다. 세계시민들 앞에선 그들을 포옹할 듯이 두 팔을 벌이거나, 그들을 축복하듯이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아니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였다.
이것은「로마」교황「바오로」6세가 즉위 이후 지난 15년 동안 우리에게 보여준 한결 같은 모습이었다. 끝도 없는 전쟁·그 위협·폭력의 난무·인권의 유린·부도덕·분열과 파괴·반목과 평화. 바로 이런 세계, 이런 교회가 그의 모습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요안」2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즉위한「바오로」6세는 무엇보다도「행동하는 교황」의 인상을 깊이 남겨주고 있다. 그는 즉위 3년만에 「유엔」을 방문하고 인종에게 평화를 호소했었다.
『인간은 전쟁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인간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 인지우도가 전쟁에 휩쓸려 있을 때도 그는 해마다 연초엔 소련의「포드고르니」, 중공의 모택동, 월맹의 호지명에게 신년「메시지를 보내고 종전을 종용했다.
그에겐 종교적인 이단도, 이념적인 적도 없었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또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오늘의「가톨릭」교회는 현 보의 문제들을 안고 세기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인구폭발·성의 자유화·진보와 보수의 갈등. 만년의「바오로」6세는 이런 난 문제들을 앞에 놓고「햄릿」과 같이 번뇌의 나날을 보낸 것 같다. 그러나 산아제한 문제에 관해 그는 끝내 종교적인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여러분은 삶의 향연에 초대되는 손님을 줄이기 위해 비합리적인 인위의 산아제한을 할 것이 아니라 인류와 식탁에 올릴 빵의 양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1897년 9월 26일「이탈리아」의 한 촌「콘체시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병약해 통학조차 불편했으며, 1차 대전 때는 징병검사에도 불합격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런 인연이었던 것 같다.
1954년부터는「이탈리아」의 배부「밀라노」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이 도시는 전통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아성이었다. 「몬티니」대주교 (바오로 6세의 속명) 는 바로 이 도시에서「노동자의 대주교」로 존경을 받았었다. 『인민의 발전』이라는 사회 경제문제를 주제로 한 그의 회칙은「노동자의 대주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교황의 일상은 초인적인 건강을 필요로 할만큼 번거롭다. 년 l백만명의 접견, 하루8회 이상의 강론, 긴 시간의 독기. 그는 만년에 교황의 임기를 80세로 제한하는 칙령을 스스로 내렸었다. 향년조세. 그는 자기의 내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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