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4)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비사|50년대"문예"지 전후-조광현(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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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인과 돈>
예술국장은『문인들에게만 연금제도를 실시하고 다른 예술가들에게 그런 제도를 실시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렇게 하려면 방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장관으로부터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연구를 해 보았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을 성안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계속 연구를 해보겠지만 이 문제는 곧 되리라고 생각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예진흥법을 만들어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윤 장관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문제가 조금은 진척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퇴임과 함께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작고문인들의 편지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가 잠깐 옆길로 들어갔지만 같은 돈 이야기라도 염상섭 선생은 작품집을 새로 내거나 작품집을 이미 낸 출판사가 망해서 그 판권을 옮기고 싶은데 적당한 출판사가 없겠는가하는 그런 내용이고 김광주씨나 양주동 박사는 언제나 원고료의 선불부탁이었다.
양 박사의 편지는 돈에 관한 것이 아닐 때는 자기 원고의 활자호수, 때로는「레이아우트」까지 해보내기도 했는데 이 양 박사와 함께 문예강연회에 갔을 때의 잊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있다.
서정주씨와 양 박사와 나와 세 사람이 몇 지방을 강연을 하며 다닌 적이 있는데 대구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호텔」에 도착을 하니까 방송국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국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방송국에서 나온 젊은이는 우리 세 사람의 제자였다. 양 박사가 『갈 수는 있지만 사례금을 주느냐』고 따졌다. 이럴 때 부탁하러온 사람이 학교제자이기도 해서 사례금을 따진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방송국 젊은이는 지방방송국이라 사례금은 없지만 특별히 교통비는 지불하기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택시」값만 받고서는 갈 수 없다는 것이 양 박사의 고집이었지만 상대가 학교제자고해서 서정주씨가 우겨 우리 세 사람이 방송국으로 가서 한30분 걸리는 좌담회를 했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는데 아까의 방송국 청년이 봉투하나를 양 박사에게 전했다. 그 봉투를 들고 다방에 들어간 양 박사는 마주 앉아있는 우리들 앞에서 봉투에서 꺼낸 돈을 여러 번 세고만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니 7백원이었다. 아무리 세어보아야 빤한 7백원인데 왜 저렇게 자꾸 세고만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다소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7백원을 세 사람이 어떻게 나누느냐하는 연구를 양 박사는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세 사람이 각각 2백원씩 나누면 백원이 남는데 내가 나이도 많고 말도 제일 많이 했으니 나머지 백원은 내가 갖기로 하겠소.
한참만에 양 박사는 이렇게 말하며 서 교수와 나에게 2백원씩을 건네주었다.
서정주씨는 한사람이 다 가져도 시원찮은 이런 돈을 나눈다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일이라는 표정으로 그 돈을 받았다.
『아니 선생님. 방송국에서는 우리 세 사람에게 7백원을 준 것이고 나이가 많거나 말을 많이 했다고 더 가지라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도 말을 많이 하고 싶었지만 선생님께서 열변을 하시기에 저는 양보를 했고…그리고 나이 많다고 사례금 더 준다는 법도 없고 그러니 나머지 백원도 어떻게 나눠 보시도록 하세요.』
내가 다소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서정주씨가 내 팔을 잡고서는『조형 양보하세요. 누가 보면 이거 참 곤란하지 않아요』하며 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양 박사의 표정도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몇번 더 항의를 하고서는 1백원을 나누기가 어려우니 양 선생님께서 갖도록 하세요』하고 내가 양보를 하는 체 했다. 물론 나는 농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내가 양보를 하자 안심하는 서정주씨의 얼굴이 참 재미있었다.
나중에「호텔」로 돌아와서 양 박사는 상기된 얼굴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다.
신동집 씨가 사회를 봤으니 1백원은 사회자에게 주어야할 것이 아니냐는 문제였다. 다방에서「호텔」로 오는 사이에 양 박사는 그 1백원의 처리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던 것 같았다.
『이치대로 하면 그런데 1백원 준다는 것도 쑥스러우니 아까 대로 그렇게 완전히 결정짓고 마십시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그것은 아무래도 합리적인 해결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양 박사의 표정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 때의 양 박사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양주동 박사가 고희를 맞이했을 때 2권의 기념출판이 나왔다.
하나는『기념논문집』이고 다른 하나는『양주동 박사「프로필」』이었다. 이「프로필」속에는 학계와 문단에서 쓴 여러 사람의 양 박사의 인품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속에 대구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쓴 나의 양 박사「프로필」도 들어 있었다.
고희를 기념하는「파티」장에서 그 글을 혹시 양 박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을 지니면서「파티」장에 내가 들어갔을 때 양 박사는 내가 쓴 그 부분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면서,『제일이야 제일 잘 썼어』하며 그날 참석한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소박하고 순수한 어린이 같은 언행은 돈에는 아주 까다로왔던 성품과 함께 그분을 아는 여러 사람에게는 독특한 한 인간상으로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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