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은 길이 다르다|「쟁이」와 「파리」의 논쟁에 붙여|장윤익 <문화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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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험구는, 비평이 아니다』는 작가 조선작씨의 글과 『비평가는 작가의 시녀가 아니다』 는 평론가 최광렬씨의 글을 읽고 얼마 전에 있었던 작가 이정환씨와 평론가 김우종씨의 논쟁을 함께 상기하면서 우리 문단에서 작가와 평론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무엇인가, 그 벽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두가지 사례 이외에도 작가와 비평가의 논쟁은 수없이 많았는데 따져보면 그 대부분이 상대방의 작업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창작」과 「비평」 은 서로 독립된 작업이면서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창작 없이 비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많은 작가들의 고정 관념과 『비평은 창작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는 많은 평론가들의 고정 관념이 작가와 평론가 사이의 벽을 더욱 단단하고 더욱 높게 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씨와 조씨의 논쟁의 발단이 된 최씨의 저서 『쟁이들의 환상과 세계』도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최씨의 평론가적 입장이 너무 고압적이었고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면 감춰져 왔던 일부 작가의 부정적인 측면이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우선 「쟁이」 (국어 대사전에 보면 「직업을 낮게 이르는 말」로 풀이돼 있다)라는 표현은 독자를 의식한 상업주의적인 색채를 약간은 풍기고 있는데 이것은 조씨가 지적한 것처럼 선의의 작가들로부터 『악의를 곁들인 문학 비평』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또한 최씨의 이른바 70년대 작가를 중심으로 한 작가론 가운데는 필자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평론가의 지각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면 찬사 일변도로만 되어 있는 우리 나라 비평 풍토에서 최씨의 글이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상업주의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의 창작 풍토에서 개개작가나 작품 세계의 본질 구명에 미흡한 점은 있지만 현역 작가들의 징후를 진단하는 관점이나 문제성의 표출에 있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씨의 글이 박씨를 비롯한 몇몇 인기 작가의 부정적인 면만 물고 늘어졌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해 작가가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다.
김우종씨와 이정환씨의 논쟁 때도 이씨의 글에서 「파리」가 등장하더니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이번 조씨의 글에서도 「파리」가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최씨는 그 반박에서 다시 『「애정 있는 충고」나 「성실한 안내」의 구실을 기대하지 말라』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쯤 되면 관전자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문학 외적인 논전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작가와 비평가의 양식을 의심하게 되리라.
작가와 비평가는 각각 자기가 가야하는 독특한 영역의 길이 있다. 작가는 창작에 몰두하면서 작품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하며 때로는 아픈 곳을 찌르는 비평가의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반면 비평가는 어떤 선입관이나 상업주의적인 매명을 배제하고 작가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우정 있는 충고자가 될 때 우리 문단의 창작 활동은 더욱더 왕성해질 것이며 아울러 수준 높은 많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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