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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23화>암환자의 마지막 나들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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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1일. 아버지는 명동에 가자고 하셨다. 절친 ‘준수 삼촌’의 아들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아들은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하는 잘 생긴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3주일 전부터 이 결혼식에 반드시 참석을 하겠다고 하셨다. 3주 전에는 늑골암의 진통이 계속돼 잘 걷지도 못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굳이 친구 준수 삼촌을 만나고, 그 아들에게 결혼을 직접 축하해 주고 싶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연인지 기적인지 며칠전부터 진통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방사능 치료의 효과가 조금 더 나타난 모양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카랑카랑해졌다. 많이 아플수록 목소리는 쉰 소리에 가깝게 변한다. 기쁜 마음에 부모님 댁으로 가 아버지를 모시고 출발했다.

아버지와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 가본 것은 3년 만에 처음이다. 아버지는 암투병을 하고, 사업이 기울면서, 결코 남의 결혼식에 가는 법이 없었다. 장례식도 몇 곳만 가고, 어지간하면 지인에게 부의금을 전해달라고 하는 일이 많았다. 이유는 뻔하다. 암으로 인해 삶의 재미도 많이 없어졌는데, 사업까지 기울고 있으니 시쳇말로 남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식에서 지인들을 만나도 “몸은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볼테고, 기울어가는 학원에 대해서 물어볼 테니 말이다.

딱 한 번. 아버지와 내가 다른 사람의 결혼식을 갔던 적이 있었다. 2011년 여름 쯤 됐을 것이다. 아버지는 식도암 수술에 이은 항암치료로 많이 쇠약해졌고, 운영하던 학원도 폐업하기 몇 달 전이다. 아버지는 식욕이 없다면서 간단한 음식을 먹고는 말았다.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장이 망하고 있는데,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간다는 것이 동료 직원들과 가족들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가격으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별미가 될 만 한 것들을 사다가 아버지와 먹었다. 결혼식에 갔던 날 역시 그렇다. 사실, 그날은 내 지인도, 아버지의 지인도 아닌 분의 결혼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내 지인 중 한 분이 축의금 전달을 요청했고, 그 결혼식장은 당시에 살고 있던 집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를 모시고 결혼식장에 갔다. 축의금 액수가 꽤 많아 밥 정도는 2명이 먹고 와도 됐을 정도였다. 대신 밥을 먹고 오겠다는 말을 부탁했던 분께 하고, 아버지와 결혼식장 뷔페에 갔다. 음식은 꽤 많았다. 일반적인 예식장 치고는 잘 차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나와 아버지는 오랜만에 외식을 하게 됐다면서 좋아했다.

기쁨은 딱 5분 갔다. 아버지는 밥을 먹다가 체했다. 수술로 식도를 잘라낸지 몇 달이 되지 않아, 목에서 위로 바로 음식물을 넘기는 연습을 하던 때였다. 체하는 일은 예사였지만, 하필 이런 날 체하다니. 아버지는 이런 자신의 처지가 속상했는지, 밥을 먹다가 눈물을 흘렸다. 얼른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비싼 밥 좀 공짜로 먹겠다는데, 하느님이 야속했다.

이날은 달랐다. 아버지는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새로 구입한 갈색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버스를 탔다. 지하철로 갈아탔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출발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였다. 5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데 에스컬레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사이에 계단이 있었다. 약 50개 정도 됐다. 30개를 걷고는, 아버지는 다시 20개를 오르려다 멈칫한다.

“아, 무슨 계단이 이렇게 많냐. 왜 여기는 에스컬레이터가 없는게냐.”

5분 정도 멈춰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간신히 모시고 20개 계단을 더 오르고는, 에스컬레이터로 명동까지 갔다.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고교 친구분 10여분이 도착했다. 다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묻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아버지 역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어릴 적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어떤 친구분과는 고교 시절 탁구 시합을 2게임 했는데, 두 번 다 아버지가 완패를 해서 다시는 그 친구분과 탁구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했다. 60대가 된 고교 친구들은 함께 친구 아들의 결혼을 지켜보고, 다같이 식당으로 가 식사를 했다.

이제 암투병 4년차. 아버지는 뷔페에 와도 여유가 있었다.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흐물거려서 삼키기 편한 음식을 1순위로 한다. 이날 메뉴 중에서는 대구찜, 유산슬, 도가니 수육 등을 골라드렸다. 또한 안 먹고 덜 먹는 한이 있어도 절대 빨리 삼키거나 급하게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아까운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당시 체해서 아쉬워하며 돌아왔던 3년 전과 지금의 차이다.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이벤트도 있었다. 이날 결혼식에 고교 시절 체육 선생님께서 방문하신 것이다. 하객을 넘어 ‘왕림’ 수준이다. 최근 팔순 잔치를 하셨다지만, 체육 선생님 출신이시고 몸 관리를 잘 하셨는지 아버지보다 어려보였다. 아버지 뿐 아니라 예순이 넘어 몸이 성치 않은 제자들 상당수가 선생님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내 아버지도 건강했더라면 저 선생님처럼 칠순, 팔순을 즐기고, 또 제자의 아들 결혼식에 와서 맥주 한 잔 걸쳤을 수 있을텐데. 아버지는 선생님께 90도로 인사를 했고, 선생님께서는 “어허 용일이. 젊은데 건강해야지. 나보다는 오래 살아야 하네!”라고 하셨다.

짧지만 강렬했던 결혼식은 1시간 반 정도 지나고 끝났다. 아버지는 평소의 2배 이상 기력을 이날 결혼식 참석에 쏟았다.

일어나면서도 아버지는 친구들과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다. 한 친구분이 말을 걸었다.

“친구야, 건강해라. 우리 또 볼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이번이 마지막 아닐까.”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다음 기회에 또 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래, 고맙다.”

나 역시 울컥했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이고 기쁨이 될텐데.

아버지와의 나들이는 큰 이벤트가 없는 이상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에 갔다가 회사에 잠시 방문하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으신다. 지방은 물론이고, 서울 시내 주요 중심가에 방문하는 것 역시 현재의 체력이나 몸 컨디션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주 컨디션이 좋았고, 아버지 역시 나들이를 잘 마쳤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큰마음 먹고 나온 이번 결혼식 나들이. 마지막이 아니길 빌어본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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