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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처럼 … 피맛골에 '식객촌' 아홉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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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현실이 만화가 되고 만화가 다시 현실이 됐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과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에 문을 연 식객촌 얘기다. 식객촌은 만화 『식객』과 연관된 맛집 중 9곳을 옛 피맛골 거리 한 자락에 모아놓은, 말 그대로 맛집 ‘촌(村)’이다. 허 화백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맛집을 한자리에 모았고, 가급적 겹치는 메뉴가 없도록 한 것이 만화와 닮았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만화 속 인물들이 실제로 걸어다닌다. 만화 『식객』 1권 4화에 등장한 곰탕집 장석철 대표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만화에서와 생김새가 똑같다. 장 대표는 옛 수하동 ‘하동관’의 셋째 아들로 하동관 강남 분점을 연 이후 새롭게 내는 가게 상호를 ‘수하동(秀河東)’으로 쓰고 있다. 하동관의 빼어난 부분만 따오자는 의미로 ‘빼어날 수(秀)’ 자를 썼다고 한다.

음식 그림은 『식객』에 나오는 허영만 화백 작품.▷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만화에서 빈대떡집의 사고뭉치 큰아들로 등장했던 ‘오두산 메밀가’의 이승하 대표는 실제로는 주먹질을 하지 않는다. 용인대 유도학과 출신의 다부진 체격이란 점을 바탕으로 만화의 재미를 위해 허구적 요소를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장은 “처음엔 식객 만화가 연재되는 일주일 내내 싸우는 장면만 나오기에 허(영만) 선생님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음식 얘기가 나오고부터는 녹두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담고 있어 선생님을 인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밥차(이동 식당)’로 전국의 영화 촬영장을 누비던 ‘전주밥차’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건물에 식당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때 영화 프로덕션 대표였던 채수영 대표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것을 보고 15년 전 현장에서 조리해 식사를 판매하는 밥차를 만들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식객촌 내의 구내식당을 자처하고 있다. 한 끼 8800원 하는 뷔페식 식사를 이웃 식당 직원들에게 7000원에 제공한다. 같은 식당이라도 메뉴에 따라 ‘밥’을 먹기 힘든 곳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여직원이 많은 ‘무명식당’은 마감 시간이면 골목길에 놓인 무거운 식탁을 치워야 하는데 체격 좋은 이승하 대표가 달려와 정리를 도와준다고 한다. ‘촌’이란 이름 그대로 ‘상부상조’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은 2~3주에 한 번씩 식객촌 번영회를 연다. 이 자리에선 ‘골목길의 미관을 위해 입간판은 전부 철거하자’ ‘계절별로 주력 메뉴가 다르니 업체별로 돌아가며 해당 달의 쿠폰을 붙인 달력을 만들자’ ‘식객촌의 날을 만들어 소외계층에게 무료 식사나 도시락을 제공하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식객촌이 이런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된 데는 새로운 경영 모델도 한몫했다. 식객촌 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이들 매출은 모두 ㈜식객촌으로 모인다. 회사는 이 매출에서 식당의 입지 조건에 따라 평균 20%의 수수료를 떼고 나머지 금액을 각 매장에 돌려준다. 대신 회사는 이 돈으로 임대료와 관리비·마케팅비 등을 충당한다. ‘부산포 어묵’의 박성환 대표는 “소규모 식당 입장에선 위험 부담 없이 맘 편히 영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비싼 임대료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계절별로 다른 가게별 매출 편차를 상쇄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식객촌의 손규현 공동대표는 “수수료로 얻는 수익보다는 식객촌을 하나의 브랜드로 키워 포장·온라인 사업, 관광 상품화하는 게 실질적 목표”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이 밑작업으로 『식객』에 등장하는 만화 중 식객촌과 관련 있는 편만 묶은 『식객, 종각에 모이다』를 영어·중국어·일본어판으로 출간했다.

 개장 당일 식객촌을 찾은 허 화백과 ‘수하동’에서 곰탕을 먹었다. 그는 밥은 적게 주문한 뒤 파를 듬뿍 넣고 소금은 넣지 않은 채 후추만 뿌려 먹었다. ㈜식객촌의 이사기도 한 그는 “뭐 만화나 그리지 이런 것까지 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며 “분위기는 다르지만 옛 피맛골처럼 큰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는 골목이 됐으면 하고, ‘거기에 가면 그 집이 있었지’ 하는 추억의 장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식객촌은 종로 한복판인 종각역, 그것도 ‘그랑서울’이라 불리는 최신식 빌딩 내에 위치하고 있다. 주차 걱정 없이 식사를 하고 주변 관광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서울시립대 이희정(도시공학)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도심의 인구공동화 현상(중심 시가지의 인구 감소)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심지에 고급 브랜드나 맛집을 유치하고 있다”며 “공간에 스토리를 입히고 주변의 휴식·관광 시설과 연계돼 있는 식객촌이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경진 기자

식객촌에서 즐기는 ‘만원의 행복’

식객촌에는 1만원 이하의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메뉴가 많다. 부산포어묵의 어묵은 1200원짜리와 1400원짜리 두 종류가 있다. 소주는 부산 지역의 시원 프리미엄(7000원)만 판다. 이밖에 전주밥차의 뷔페(8800원), 오두산 메밀가의 전통 녹두전(9000원), 무명식당의 무명 밥상(1만원), 수하동의 곰탕(1만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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