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긴급 진단

북·일합의를 환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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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영희
대기자

일본은 한국과 미국이 안 하고 못 하는 것을 대신 해냈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비전략적 무행동’이다. 미국 외교팀의 관심의 초점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중동으로 떠났다.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에 착수해야 대화에 응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우선 만나서 비핵화를 논의할 생각이 없다. 미국은 대북제재 강화를 준비하지만 중국에 제재의 구멍(Loophole)이 남아 있는 한 북한에 결정타가 되지 못한다.

 한국의 박근혜 정부는 김장수-남재준-김관진 안보 3인방의 대북 강경노선으로 뒷받침된 대북 원칙론에 묶여 북한과의 말문을 닫아 걸고 개성공단 정상화의 후속으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도 단발로 끝났다. 북한은 4차 핵실험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비핵화 전망은 가물가물 멀어간다.

 북한의 고립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소외감을 자극한 것이 중국의 태도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지 2년 반이 되지만 북·중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은 가운데 작년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이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곧 한국을 방문한다. 북한의 유일한 후원자인 중국한테서 냉대를 받아 유사시에 중국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김정은이 느낄 폐색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2013년 3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북한 제재 위에 내린 설상가상이다. 김정은이 고립 탈출의 길을 일본에서 찾은 것은 시기적절한 선택이었다.

 1997년 ‘납치 피해자 가족 모임’을 주도한 아베는 2002년 관방부 장관으로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에 동행하면서 납치문제 해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다. 2006년 총리 취임 후 아베는 납치 피해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 마케팅’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2012년 총리로 컴백한 아베는 납치문제를 최우선의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그에게 납치문제는 다목적 카드다. 국내의 인기몰이는 물론이고 장기 냉각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일관계에서 북한 카드는 한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 있는 지렛대다. 아베 정부가 영토분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서먹한 북·중관계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국제적인 고립에서 숨 쉴 구멍을 찾던 북한은 납치문제로 치솟는 아베의 인기와 납치문제를 풀겠다는 그의 집념에 착안하여 국가보위부 실력자를 일본에 보내 협상을 제의했다(아사히신문 보도). 북한과 일본은 작년 말부터 중국과 베트남에서 극비로 접촉한 결과 지난 3월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가 몽골에서 외손녀와 극적인 상봉을 했다. 그것은 북·일교섭의 획기적인 성과였다. 그걸 본 한국과 미국은 북한과 일본 간에 큰 합의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예감하고 두 나라 교섭대표들의 동정 파악에 동분서주했다.

 한국과 미국의 경계에도 아랑곳없이 북한과 일본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 북한이 납치자 전면재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키면 일본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한다. 한·미·일 북핵공조에 치명적인 타격이다. 한국과 미국이 북·일 빅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북·일협상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정당한 요구다. 그러나 북·일합의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북·일합의의 긍정적인 요소와 활용가치는 높다. 어렵사리 성사된 북·일합의에 불평만 해서는 북한문제에서 한국의 입지가 극도로 좁아진다.

 북·일 합의문의 첫머리에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실현할 뜻을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스톡홀름 합의대로 납치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어 국교정상화 논의까지 갈는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밖으로 유인하는 공을 세웠다. 북한이 일본과의 심층 대화로 국제사회와 말문을 튼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진전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북·일합의가 납치문제 해결과 일본의 대북제재 완화라는 일회성으로 끝나버리고 북한의 호전성과 핵 위협은 전혀 해소되지도 않고 해소될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하기 나름으로 북·일합의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북한을 핵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기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북·일합의에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완고한 원칙론을 접고 5·24 조치를 해제하고 금강산 관광을 다시 시작하고 당국자 회담을 재개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신뢰 구축의 축이다. 한·일관계도 큰눈으로 보고 정상들이 만나 정치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 정치에 편입(Embedding)되어 동북아 정치의 틀 밖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일본은 이 지역의 주요 이해당사자(Stakeholder)로서 반드시 북핵을 시야에 두고 북핵공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대북협상을 해야 한다. 북핵을 방치하고 북·일 간 현안만 해결하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고 이기적인 나라로 낙인 찍힌다. 아사히신문 보도대로 9월께 김정은·아베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당연히 북핵이 주요 의제로 올라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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