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엔 숯불구이집 3층엔 노인요양원 … 불 나면 무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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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의 한 5층짜리 건물. 1층에는 숯불구이 고깃집이 있다. 2~3층에 입주한 노인요양원에는 혼자서는 거동조차 어려운 노인 16명 등 모두 18명이 생활한다. 이런 복합건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노인들이 대피하기 쉽지 않아 큰 피해가 날 수도 있다. [정종문 기자]

30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5층짜리 건물 2~3층에 입주한 A노인요양원. 치매·중풍을 앓고 있는 노인 18명이 기거하는 공동생활가정이다. 혼자 힘으로 거동할 수 있는 노인은 두 명뿐이다. 이 건물 1층엔 약 250㎡(75평) 규모의 대형 숯불구이 고깃집이, 4·5층에는 교회가 입주해 있었다. 바짝 붙은 옆 건물 1층에는 횟집·고기구이집·치킨집·오토바이 판매점이 있다. 다른 쪽 옆 건물의 싱크대 공장에선 용접 작업이 한창이었다.

 건물 엘리베이터는 어른 3~4명이 겨우 탈 정도로 협소해 환자용 침대가 들어갈 수도 없었다. 계단은 어른 두 명이 겨우 지날 정도로 너무 좁았다. 화재 발생 때 비상구 역할을 해야 할 계단 곳곳에는 신발장·화분 등이 길을 막고 있었다.

 2010년 지금의 고깃집 자리에 있던 수퍼마켓에서 불이 났다. A노인요양원 이모 대표는 “당시엔 곧바로 진화해 대피는 안 했지만 큰일 날 뻔했다”며 “지금도 불이 날까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 요양원은 야간에 층당 두 명의 직원이 당직을 선다. 만약 불이 난다면 짧은 시간에 노인 환자들을 업고 2~3개 층을 내려온다는 것은 거의 어려워 보였다. 이처럼 복합건물의 중간층에 입주한 요양시설의 안전이 무방비다. 그런데도 임대료가 저렴하다 보니 대도시의 이런 건물에 입주하는 요양시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요양시설이 아무리 소방 설비를 잘 갖춰도 같은 건물에 입주한 음식점·노래방·유흥업소에서 불이 나면 대형 참사로 비화될 우려가 높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현행법상 요양시설은 건물의 어느 층에 들어서도 상관없다. 어떤 경우에는 9·10층에도 들어가 있다. 불이 나도 전기가 끊기지 않고 연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설계된 비상용 엘리베이터는 11층 이상 건물에만 의무적으로 설치한다.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시행하면서 요양시설 부족을 우려해 기준을 느슨하게 잡았던 게 지금 와서 안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화재 걱정 때문에) 겨울에는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요양시설 자체 화재 대비도 부실하다. 건보공단이 지난해 전국 요양시설 3664곳의 화재 안전을 점검해봤다. 39.8%가 재난 대피훈련을 안 하거나 재난 대응 매뉴얼조차 없었다. 셋 중 한 곳(28.6%)은 소화·경보 시설이 없거나 점검 불량이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한데, 비상구가 없거나 유도등이 꺼져있는 경우가 7.9%였다. 요양시설 3곳 중 1곳(32%)은 산소통·산소마스크가 없거나 상태가 나빴다.

 선진국은 노인 특성을 감안해 안전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노인요양시설의 경우 커튼·바닥재 등에 불이 나도 두 시간 이상 타지 않는 내화(耐火) 자재를 사용해야 한다. 병원 건물은 노인들의 대피가 어려운 점을 감안한 조치다. 일본은 일시 대피 공간을 활용한다. 같은 층 한쪽에 화염과 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전 공간’을 만들어 환자를 옮긴다. 바퀴 달린 환자 침대를 밀어서 이동할 수 있다. 구조될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번다.

전문가들은 요양시설·병원 이용자가 거동이 불편한 특성을 감안해 일반 건축물보다 안전 기준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원대 최규출(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노인요양시설도 유치원·어린이집처럼 설치 층수를 제한(원칙적으로 1층)하고, 시설 위치를 지정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면서 “소규모 시설도 안전 기준을 강화하고 안전종합정밀점검 대상에 포함해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병원 건물은 10층 이하라도 화재 대피 전용 엘리베이터를 의무적으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최재욱(예방의학과) 교수는 “정부 예산만으론 급속한 고령화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과거엔 민간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전 기준을 낮췄다면 이제는 안전 기준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영·장주영·김혜미·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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