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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대신 손 내민 오바마, 부드러운 패권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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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002년 6월 1일,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졸업식에 참석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 필요할 때는 선제적 행동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명백한 위협이 아닌 대상을 향해서도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부시 독트린’의 탄생이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8일(현지시간) 같은 장소에서 버락 오바마(사진) 대통령은 부시 독트린의 공식 철회를 선언했다. 그는 “국제 문제에서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순진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전략”이라고 일축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군사개입이 유일한 방법이라 는 비판을 두려워해 여러분(생도)을 사지로 보내는 건 내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절대 단독 행동을 하지 않겠다”며 유엔 등 국제기구와 동맹국, 반테러 네트워크를 활용하겠다고도 밝혔다.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 등을 통해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 지구적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서유럽·일본 등 다른 강대국들은 미국의 세력에 대항하거나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협력을 택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침략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이들 국가가 공유했기 때문”이라는 게 로버트 페이프(정치학) 시카고대 교수의 분석이다.

 이런 인식은 부시 정권이 이라크 등을 상대로 ‘예방전쟁’을 펼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침략행동을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에 다른 나라들도 미국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이후 강국들은 군사적 대항은 하지 못했지만 경제·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미국을 견제하는 ‘연성 균형(soft-balancing)’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유엔 안보리 승인 반대 등으로 미국의 일방적 군사행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에 독립적인 유로 경제권도 강화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이란 핵 문제, 시리아 사태 등에서 미국 주도의 제재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특히 중국은 대량 보유한 미국 국채로 미국 경제를 제어하며, 각종 지역 협력기구를 결성해 미국을 배제한 아시아 패권을 노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등 미국이 통제력을 행사했던 중동 국가들도 미국의 대테러전에 딴죽을 걸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런 움직임들은 국제 이슈들에서 미국의 결정력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려 왔다.

 패권적 질서가 와해될 위기에 이르러 오바마가 내놓은 고육책이 군사행동 자제와 다자주의로의 복귀인 것이다. 패권국이 자신이 지고 있는 책임을 줄이고 주변 강국들과 협의를 강화하는 것은 패권 유지의 주요 방법이라고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국이 베트남전과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1970년을 전후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도 군사·정치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선언과 금(金)태환 정지를 통해 미국의 부담을 줄였다. 오바마는 “요점은 미국이 항상 세계 무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끄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끄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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