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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남전 (하)|인지 적화 책임은 미 의회가 져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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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폭은 그 목적을 달성했다. 폭격은 성공적이었고 이제 그만두어도 좋게 되었다. 73년1월l5일 아침 10시 월맹에 대한 폭격과 기뢰 부설이 무기한 중지됐다.
이제는 「티우」 월남 대통령으로 하여금 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하는 문제만 남았다. 「티우」는 10월이래 시간을 벌면서 그전보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유리해져 있었다.
의회가 개입하여 나의 전쟁 권한을 제한 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협정 종결의 막판에 몰리면 「티우」도 양심과 애국심에 따라 우리에게 동조할 것으로 나는 믿어 왔다. 이제 「티우」에 대한 나의 평가가 저울대에 오를 싯점에 이르렀다.

<북폭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키신저」의 「워싱턴」 귀환 직후인 1월14일 「헤이그」장군이 또 다시 「사이공」으로 떠났다.
1월16일 아침 「헤이그」는 「티우」와 만나 나의 서한을 전했다. 나는 1월23일 협정에 가조인 한 뒤 1월27일 조인할 작정이라고 이 서한에서 통고했다. 나는 『필요할 경우 단독으로 협정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본인은 귀 정부가 평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 결과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원조의 즉각 중지가 불가피하게 되며 그 정부가 바뀌더라도 이 조치는 저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협정 서명과 동시에 미국은 귀하의 정부가 월남 유일의 합법 정부이며 월남 영토에 어떤 외국군도 주둔할 권리가 없다는 것, 또 협정 위반의 경우 미국은 이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는 점을 뚜렷이 강조할 것입니다. 본인은 월남 공화국의 자유와 발전에 대한 우리의 공약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충분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계속한다는 것이 본인의 확고한 의도입니다.』
일기 (73년1월16일)
「티우」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가 자살을 택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과 조국을 살릴 수 있는 해결책에 협력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그의 말대로 협정을 거부함으로써 영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조국을 구원하는 정치가가 될 것인가였다. 그렇지만 그가 협정을 거부한다고 해서 과연 영웅이 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월남인들은 너무 전쟁에 시달려 기진맥진, 휴전을 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1월17일 「헤이그」와 「티우」는 잠깐 만나 두번째 회담을 가졌는데 분위기는 흥분돼 있었다. 이 자리에서 「티우」는 나에게 보내는 서한을 「헤이그」에게 전달했다. 서한 내용은 핑계 투성이의 비타협적인 것이었다. 나는 즉각 회답을 보내 「티우」의 주장을 하나 하나 반박하고는 그가 회피할 수 없도록 통고했다.
『우리에게는 지금 단 하나의 결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전쟁 중에 잘 유지해온 밀접한 협력 관계를 휴전 협정 성립 후에도 계속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1월18일 「워싱턴」과 「하노이」에서는 『협정서를 완결하기 위한』 「파리」 평화 회담이 1월23일에 재개된다고 동시에 발표됐다.
「티우」의 반발로 험악한 말들이 오가고 몇 차례의 서신 교환이 있은 뒤 「티우」는 결국 이 협정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책상 앞에 마주 앉은 「벙커」미 대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조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말했다.
1월23일 밤 10시, 나는 「파리」 평화 협상이 타결됐으며 월남 휴전이 1월27일부터 실시될 것이라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한때는 분위기 험악>
73년6월25일 하원은 「캄보디아」 폭격 자금 사용의 즉각 중지를 요구한 상원의 법안에 동의했다. 이 법안은 월남 평화 협정 이행에 내가 필요로 하는 수단을 봉쇄해 버렸다.
우리는 공산 「크메르·루지」에 대항하고 있는 「캄보디아」에 대한 지원을 포기해야할 형편에 이르렀다. 월맹은 평화 협정을 위반하면서 공산 「크메르·루지」를 지원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완전히 당황했다. 그들은 더우기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한 판에 우리가 등을 들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회는 어떤 반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결과야 어떻게되든 그대로 밀고 나갈 결의였다. 의회가 어느 정도 둔감했느냐 하는 것은 「키신저」가 휴전 위반 문제를 「레·둑·토」에게 따지려고 「파리」로 떠나기 전 수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의회에 대해 협상의 「카드」 없이는 「키신저」를 「파리」로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상원 민주당 원내 총무인 「마이크·맨스필드」는 『공감』을 표시했으나 그 이상의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상원의 두 위원회는 「캄보디아」의 전투 자금 사용을 봉쇄하기로 결의했다. 이 법안은 1월25일에 통과됐다. 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원은 같은 날 나의 거부권에 승복했다. 그러나 또 다른 자금 중단 법안이 제안될 것이고 내가 이 싸움에서 끝내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캄보디아」에서의 폭격 중지 날짜를 1973년8월15일로 잡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행동 자금은 의회의 승인을 받기로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칼·앨버트」 하원 의장과 상원 민주당 원내 총무 「마이크·맨스필드」에게 서한을 보냈다.
『우방인 「캄보디아」의 포기는 다른 나라, 이를테면 태국 같은 나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본인은 의회가 이에 따라 초래될 결과를 충분히 인식해 주기 바랍니다.
나는 특히 폭격 중지 조치가 「인도차이나」에서 평화를 지속시키려는 미국의 결의를 포기하려는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캄보디아」인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월맹 측이 「캄보디아」의 폭격 중지를 오판, 「파리」 협정을 위반하여 새로운 공격을 시작한다면 중대한 잘못을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미국 국민들은 그와 같은 공격에 적절한 조치로 대응할 것입니다.』
평화 협정 후 2년여 동안 월남인들은 자력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해서 싸웠다.
이것은 월남인들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자유롭게 살려는 욕망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전쟁의 월남화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개월만에 깨진 12년 희생>
그러나 평화 협정에 따른 우리의 의무 이행을 의회가 봉쇄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 틈을 타 예상대로 공격해 들어왔다.
의회가 취한 이러한 자금 봉쇄 조치는 1973년11월에 통과된 대통령의 전쟁 수행권 제한 결의안과 더불어 「캄보디아」의 공산화와 75년4월30일 월맹에 의한 월남 공산화를 초래했다.
월맹이 공공연히 「파리」 평화 협정을 위반했을 때 의회는 나와 「포드」 대통령이 이에 대처, 보복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 더욱 파국적이고 용납할 여지가 없는 사실은 의회가 74년 월남에 대한 군사 원조를 삭감하기 시작한 조치였다. 이때 소련은 월맹에 대한 원조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이 결과 월맹이 1975년 봄 월남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을 무렵 월맹 측은 월남보다 전력이 우세했으며 「파리」 협정을 이행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월맹 측에 아무런 위험도 되지 못했다.
미국이 12년 동안의 희생을 치르고 얻은 「인도차이나」의 평화는 의회가 우리의 의무 이행을 거부함으로써 수개월만에 상실됐다. 따라서 의회는 이 비참한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수십만의 반공 월남인과 「캄보디아」인이 학살되거나 굶주림으로 죽어 갔고 대량 학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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