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월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말없이 그이/보내드리오리다….
소월의 시는 언제나 아련한 애상에 젖어 있다. 흙이 묻은 언어로, 풀기가 남은 무명옷의 그윽한 향기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그는 노래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음성인양우리의 일상 언어인듯 그의 노래는 따뜻하고 친근하다. 그 은은함 속에서의 영롱한 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눈이 부시다.
소월은 시를 만든 것이 아니고 낳은 것 같다. 그의 은밀한 곳에 오랜 시문을 두고 시를 품으며 그의 모든것을 여기에 불어넣어 비로소 한편의 노래를 낳아 놓는 것이다. 체험이 없는, 생활과 사삭 없는 시를 그는 마음에 품지 조차 않았다.
그가 첫 작품을 발표한 연대는 1920년 봄. 『창조』지 5호에 실린 『낭인의 봄』 이었다. 그때나이는 10대를 넘어서는 18세의 소년시절. 그의 조부는 성쇠가 부침하는 광산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월이 성장하던 무렵은 이미 집안이 날로 쇠락하고 있었다. 한때는 민족지사들의 명문교인 오산학교를 다니며 마음의 눈에 빛을 담기도 했었다. 그 시절의 오산교에는 김억 (안서)과 같은 교사도 있어서 소월의 문학적 성장에는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3·1만세가 터지면서 그는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의 배재학당으로 전학했다. 그후에는 동경상대를 지망한 일도 있었지만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그가 만일 이 대학에 진학을 했었다면 글쎄 오늘의 소월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인의 생애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빈한하고, 고독한 것인지-. 소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문학적 성숙기인 20대는 실의와 좌절과 빈궁속의 나날이었다.
작가 김동인은 소월을 처음 만나고, 또 그의 시를 읽고『이 놀라운 천재의 출현에 입을 딱 벌렸다』고 외쳤었다. 그러나 문학의 천재가 인생의 천재는 아니었다.
소월은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세에는 마약의 과용을 자초해 결국 자살을 하고 만 것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소월의 최후는 끝내 수수께끼로 남게되었다. 그의 무덤은 향리 북한의 평북 어느곳에 있다.
지금 서울에는 그의 후손들이 몇이 있다. 소월의 생애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생활도 하나같이 빈한한 것 같다. 소월을 두고 「민족시인」이라는 말조차 하기에 낮이 간지러운 일이다.
최근 본사발행 계간 『문예중앙』지(1978년 봄호)가 소월의 유고를 다수 발굴, 발표했다. 새삼 소월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아 감회가 깊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