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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전 일제가 헐어버린 대구남문 복원키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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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진왜란후 왜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았던 영남제1의 요새인 대구남문이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된지 70년만에 복원된다. 대구시는 전통적인 향토문화재를 중건보수하기 위해 이미 흔적을 잃은 대구성의 동서남북문 가운데 남문을 복원키로한것.
1억5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올해안에 복원을 끝마칠 남문은 중층문루(중층문루)에 팔작 (팔작)지붕을 올린 이조후기의 건축양식으로 1층은 정면이13·079m, 측면7·656m, 2층정면 9·899m, 측면 4·466m의 규모다.
예부터 사통팔달의 땅으로 군사·정치·경제의 요충지이던 대구에 성벽을 쌓기는 2백41년전인 이조 영조12년 (1736년).
당시 경상감사였던 민응수는 상감에게 장계(장계)를 올려 『동래에서 대구에 이르기까지 허술한 토성을 제외하면 영구축성이 한군데도 없으니 만일 왜적이 침입한다면 임진·정유왜란처럼 큰화를 입어 온나라가 초토를 면치 뭇할것이라는 진언이 받아들여져 영남 최초의 석성(석성)을 쌓게된 것이다.
성벽의 규모는 둘레가 2천6백여m, 성높이는 4m로 당초 대구성에는 동서남북에 4성문이 있었고 문루를 세웠으며 동은 진동문 서는 달서문 북은 공북문이라 불렀으며 이번에 복원되는 남문은 영남제1의 관문이라 불렸다.
기록에따르면 연인원 7만8천6백명이 동원되어 착공 5개월만에 완공했으며 성벽에는 1백비 (비)를 세우고 각비에 비장 1명씩을 배치했으며 관찰사가 매일 비장들의 근무실태를 파악하기위해 순찰을 했다는것.
당시 남문은 현대구경찰서에서 남쪽으로 뻗은 중구 종로와 남성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에 세워졌고 동문은 중구동성로1가 동신지하도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또 서문은 중구서문로1가52 조흥은행 대구서지점앞 네거리에 세워졌으며 북문은 중구대안동57 현중구보건소앞 네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국목민(호국목민)을위해 축성한 대구성벽이 애석하게 헐려지기는 한일합방후인 이조고종43년(1906).
이당시 대구군수이던 박중양이 남산내에서 한약과 잡화상을 경영하며 치부한 일본인들의 농간에 놀아나 대구역에서 성안으로 도로를낸다는 이유로 성벽을 헐어버렸다는 것.
이때문에 대구에 살고있던 일본인 1천5백여명이 경부철도부설과함께 성밖토지를 매점했으며 그들의 상권확장의 계기가 되었다.
축성의 목적과 철거의 목적이 그렇게도 엇갈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없다.

<대구=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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