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병언 재산 환수, 새 법 만들기보다 상법 적용이 빠른데 …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6호 07면

경찰관들이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고 잠적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 대한 지명수배 전단을 전신주에 붙이고 있다. [뉴스1]

상법 176조는 ‘회사의 해산명령’에 대한 것이다. 조항에는 ‘법원은 다음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해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또는 직권으로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다음의 사유’는 ①회사의 설립 목적이 불법한 것인 때 ②회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설립 후 1년 내에 영업을 개시하지 아니 하거나 1년 이상 영업을 휴지하는 때 ③이사 또는 회사의 업무를 집행하는 사원이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하여 회사의 존속을 허용할 수 없는 행위를 한 경우에 해당된다.

[세월호 참사] 관련 법안의 허와 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검찰과 국세청이 유병언(73)씨 일가와 측근들의 재산을 추적 중이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선체 인양 등을 포함한 복구 비용을 염두에 둔 조치다.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며 은닉 재산 몰수를 위한 입법 계획을 밝혔고, 정부와 새누리당은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른바 ‘유병언법’이다.

하지만 이미 상법에 유씨 관련 재산을 추적해 압류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 176조에 따라 검찰이 청해진해운·천해지·아이원아이홀딩스 등 유씨와 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회사들에 대해 법원에 해산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이사 또는 사원이 법령을 위반해 회사의 존속을 허용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검찰이 회사의 해산명령을 법원에 요청한 적이 있다. 2003년 대구지검 안동지청은 과적운행에 따른 벌금을 내지 않고 세금을 장기간 체납한 한 운수회사에 대한 해산명령을 법원에서 받아냈다.

법원의 해산명령은 회사에는 사형 선고다. 명령과 동시에 파산 절차에 돌입한다. 법원은 이를 관리하는 파산관재인을 지정해 파산에 필요한 조치들을 이행토록 한다. 파산관재인은 회사의 민·형사상 책임에 대비해 회사 관계자의 재산을 가압류할 수 있다. 부당하게 회사의 이득을 챙긴 제3자를 상대로도 반환을 요구할 수 있다. 파산 관련 업무 전문인 김관기(51) 변호사는 “회사 해산명령 제도를 활용하면 유씨와 가족, 측근들의 재산을 추적해 압류할 수 있다. 이미 있는 법으로도 충분히 은닉 재산 환수가 가능한데 새로운 법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이 해산명령 제도를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특별법에 보상 기준은 포함 안 돼
박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뒤 정부와 새누리당이 바쁘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새로 만들거나 고쳐야 할 법이 많다. 그중 희생자·실종자 가족에 대한 보상·배상과 책임자 처벌에 관련된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 보상 특별법’(가칭)을 만들고 있다. 새누리당은 ‘유병언법’을 준비하고 있다. 법무부는 엄중한 형벌 부과를 위한 형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대통령·정부·집권당은 피해자 보호와 일벌백계를 위한 강력한 조치로 입법을 서두르지만 일각에선 이러한 법들의 필요성과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효능이 부풀려진 과장 광고라는 주장도 있다. 만병통치 대책처럼 보이지만 약효는 별로 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해수부가 맡은 세월호 보상 특별법안은 정부가 우선 피해자에게 보상한 뒤 차후에 사고 책임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골자다. 박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는 국가가 먼저 피해자들에게 신속하게 보상하고, 사고 책임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특별법안을 정부 입법으로 즉각 국회에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해수부의 법안 준비 실무 책임자인 김성범 해운정책과장에 따르면 법안에는 피해자 배상뿐 아니라 선체 인양 등의 복구 작업에 대한 비용도 정부가 우선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정부에서 지출한 비용은 유씨 일가 및 회사 관계자들과 세월호의 보험회사에서 차후에 받아낸다는 계획이다.

사고 관련 보상에 정부가 특별법을 만든 전례는 찾기 힘들다. 해수부가 ‘선 보상 후 구상권 행사’의 참고 사례로 삼고 있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경우에는 특별법 없이 국무회의 의결로 서울시의 우선 보상이 결정됐다. 재난관리법(현행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의 국가의 신속한 대응·복구 책무 조항이 근거였다. 정부 관계자는 “반드시 특별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과 정부가 ‘특별한 수단’를 동원할 정도로 피해자들의 배상과 보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삼풍백화점 경우에는 사고 두 달 뒤 선 보상안이 결정됐고, 그로부터 5개월 뒤부터 보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해수부는 다음달에 특별법을 국회에 내 최대한 빨리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보상금 지급까지는 이번에도 역시 최소한 수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김 과장은 “특별법안에는 보상금 지급 기준이나 액수 등 구체적인 사항까지 명시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보상 관련 위원회와 같은 기구가 구성돼 이를 논의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유병언법은 김우중법 틀 안에서”
사회적 피해를 크게 끼친 기업과 경영자의 재산 몰수와 관련된 ‘유병언법’도 어떤 내용을 담게 될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기업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히면서 탐욕적으로 사익을 추구하여 취득한 이득은 모두 환수해서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재원으로 활용하도록 하고, 그런 기업은 문을 닫게 하겠다. 이를 위해 범죄자 본인의 재산뿐 아니라 가족이나 제3자 앞으로 숨겨놓은 재산까지 찾아내어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입법을 신속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큰 피해’나 ‘탐욕적으로 사익을 추구’ 등 적용의 객관적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표현들이 담겼다. 그런 만큼 이 법안을 추진 중인 새누리당의 핵심 의원들의 생각도 조금씩 다르다.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유병언법’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이른바 ‘김우중법’의 틀 안에서 내용을 보완해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우중법은 정부가 지난해에 낸 ‘범죄수익은닉규제처벌법 개정안’을 일컫는다. 추징금 미납자가 재산을 제3자에게 빼돌려 놓은 것으로 검찰이 확인하면 사해행위(詐害行爲·채무자가 채권자의 재산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명의로 재산을 숨기는 것) 취소 소송을 거치지 않고도 강제로 몰수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추가하는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법원에서 17조9253억원의 추징이 선고됐지만 887억원만 냈다. 김 전 회장은 가족과 측근들 명의로 거액의 차명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부과된 추징금을 가족에게 숨겨진 재산에서 강제 집행할 수 있도록 만든 ‘전두환법’(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을 기업인 등에게 확대해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김우중법은 벌금이나 추징금 강제 집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유병언씨 일가의 은닉 재산 추적에 적용되기는 어렵다.

새누리당 법사위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국가가 피해자들을 대리해 손해배상 책임자들의 재산 도피나 은닉을 일찌감치 방지할 수 있는 규정이 법안에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당의 이완구 원내대표는 “당과 정부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서 포괄적인 검토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우중법안과 관련 없이 새로운 형태의 법안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 윤곽이 그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엄중한 형벌’에 법무부도 고민
대형 사고 책임자에 대한 형벌 문제는 법무부가 검토 중이다. 박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심각한 인명 피해 사고를 야기하거나, 먹거리를 갖고서 장난쳐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는 엄중한 형벌이 부과될 수 있도록 형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선진국 중에서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야기하는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수백 년의 형을 선고하는 국가들이 있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수백 년 형 선고’는 형벌 ‘합산주의’를 택하고 있는 미국·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죄를 저질렀을 때 각각의 죄에 대한 형을 모두 더해 처벌하는 원칙으로 ‘병과(倂科)주의’라고도 불린다. 한국은 독일과 프랑스처럼 여러 죄를 저질렀을 경우 가장 큰 죄에 내려지는 형의 2분의 1까지만 가중해서 처벌하는 ‘가중주의’를 형법의 틀로 삼고 있다. 한 피고인이 징역 10년, 6년, 3년, 2년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합산주의 국가에서는 징역 21년까지 선고할 수 있지만 가중주의하에서는 15년(10년의 1.5배)까지 선고한다.

법조계에서는 합산주의가 더 선진적인 제도로 보기 어려우며, 형벌에 관련한 법 체계를 바꾸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다. 검사 출신인 노명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합산주의를 택하면 가벼운 범죄가 여러 건인 경우 과도하게 처벌받는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 국회가 합의하면 도입할 수는 있겠지만 하루아침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법무부도 이 같은 시각을 의식해서인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주현 검찰국장은 “지금은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 이상으로 밝힐 수는 없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