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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글로벌 포커스] 한국은행 기준금리 변동 보폭 좁히면 안 되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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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호 18면

세월호 참사에 가려 주목을 끌지 못한 글로벌 경제 변수들이 있다. 미국 장기 국채금리의 하락과 달러화 약세, 신흥국 주가의 회복 등이다. 이들 현상은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됐다. 그동안 상승 흐름을 보여온 미국 경제가 힘에 부쳐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주저앉거나 쓰러지진 않겠지만, 더 이상 강하게 뻗어가기도 힘들다는 얘기다. 시장은 저성장이란 뉴 노멀을 확인하며 지나쳤던 낙관론을 교정하고 있다.

미국의 경기 상승을 이끌었던 주택시장은 오름세가 멈춘 상황이다. 생산과 소비 지표들도 정체되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대를 그런대로 유지하겠지만 3%대 안착은 아직 힘겨워 보인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도 경기 진단에 대해 최근 부쩍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지만, 금리 인상은 가급적 천천히 할 것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내년 상반기 중으로 예상됐던 기준금리 인상 시점은 하반기 중으로 늦춰질 것이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앞으로도 사실상의 제로금리가 1년 이상 이어질 것이란 얘기다. 그 뒤 인상되더라도 고작 2%대가 끝일 것이란 예상도 득세하고 있다.

멀고도 험한 글로벌 경제 정상화
미국의 장기 금리가 최근 크게 떨어진 이유다. 연초 3% 선이었던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2.5% 선으로 내려앉았다. 시장 금리가 하락하고 경기 상승의 힘이 약해지니 미 달러화 가치도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이 와중에 미국 등 선진국 금융시장에서 싼 금리로 돈을 빌려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딩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 주요 신흥국 증시가 상승하고 이들 국가의 통화가치가 강세를 보이는 배경이다. 한국의 코스피 지수가 2000선을 회복하고 원화가치가 달러당 1000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쉽다.

일러스트 강일구

이런 흐름은 당분간 계속돼 신흥국의 주가와 통화가치가 더 오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외국인 자금은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지난해와 같은 신흥국 시장 쇼크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핫머니의 유·출입을 예의 주시하며 단단히 대비를 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은 신흥국 중에선 경제 펀더멘털이 가장 좋은 그룹에 속하고, 외환보유액도 두둑하게 쌓아놓아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편이다. 그렇다고 방심해선 안 되며 다양한 정책적 대응을 강구해 둬야 한다.

아쉬운 점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조절 기능이 마비돼 있다는 사실이다. 벌써 12개월째 기준금리가 2.5%에 묶여 있다. 미국 Fed가 금리를 올릴 때가 돼야 한국은행도 움직일 것이란 전망이고 보면 앞으로도 1년은 더 동결할 공산이 커 보인다. 기준금리를 활용한 통화정책을 펴면 경기 흐름의 조절은 물론 환율 변동폭 축소와 핫머니 유·출입 제한 등 여러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스스로 손발을 묶어두고 있는 셈이다.

0.25%포인트 족쇄 못 풀 것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기준금리를 한번 움직이려면 최소한 0.25%포인트(25bp)는 돼야 한다는 제약도 크게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0.25%는 현 기준금리(2.5%)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지금처럼 저성장·저물가 흐름이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뚜렷한 위기 징후도 없는 상황에선 부담스러운 금리 진폭이 아닐 수 없다. ‘0.25% 트랩’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왜 기준금리의 변경 단위는 0.25%포인트일까? 0.1%포인트나 0.01%포인트는 안 되는 것일까? 한국은행에 물어보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0.25%포인트로 하라는 법규나 기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저 미국 Fed에서 시작된 관행을 우리도 따르고 있을 뿐이다.”

기준금리 방식의 통화정책을 처음 편 게 1990년대 초 미국이었는데, 당시 Fed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아기 걸음마(baby step)처럼 조금씩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며 0.25%포인트로 정한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쓰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90년대 미국의 기준금리는 5~10%를 오르내려 0.25%포인트면 정말 적당한 수준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 아닌데도 세계의 거의 모든 중앙은행들이 이런 관행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께 제안하고 싶다. 한국이 앞장서 기준금리 조정의 보폭을 좁혀보자고 말이다. 황새 보폭을 버리고 참새 보폭으로 경쾌하게 가보자는 얘기다. 지금의 절반 이하인 0.1%포인트도 좋고 5분의 1인 0.05%포인트도 좋다. 작은 보폭의 탄력적인 기준금리 조정은 요즘처럼 환율이 급변하고 세월호 참사로 내수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다. 애매모호한 레토릭에 의존할 것 없이 금리로 직접 시그널을 주기 때문에 시장과의 불통 시비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변화가 자리를 잡으면 한국은행과 이주열 총재는 세계 중앙은행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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