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시 쓰는 고대사] 성골 남자 씨 마른 신라, 선덕 내세워 왕통 신성함 지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6호 28면

경주시 신평동의 여근곡.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에 나오는 여근곡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 권태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 등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은 성차별 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의 모든 왕국에서는 엄연히 남녀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데 유독 신라에만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제27대 선덕(善德)여왕(632~647), 제28대 진덕(眞德)여왕(647~654) 그리고 제52대 진성(眞聖)여왕(887~897)이 그들이다.

<12> 신라 여왕의 탄생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차녀 선덕(덕만이라고도 함)공주가 첫 여왕이 되는 과정은 짐작이 가듯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물론 진평왕과 마야(摩耶)왕후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출발점이 됐다. 진평왕의 남동생들인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과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이라도 아들을 낳았더라면 성골 남자의 왕위 계승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차녀 선덕공주는 처음부터 1순위가 될 수 없었다. 언니인 장녀 천명(天明)공주보다 서열이 뒤진 데다 이전에 공주가 여왕이 된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복잡한 방정식이 전개됐다. 603년 진평왕은 37살 때 결단을 내려야 했다. 폐위된 제25대 진지왕(眞智王·재위 576~579)의 아들인 용수(龍樹)전군(殿君·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을 장녀 천명공주와 결혼시켜 사위의 자격으로 일종의 태자를 삼는 방법이었다. 용수가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은 성골 신분을 갖고 있던 천명공주에 기인한다. 모계제 사회에서도 여자는 그러한 정당성을 갖지만, 실제 왕위 등의 자리는 남자가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화랑세기』 『13세 용춘공(용수의 동생)』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 (진평)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 전군이 사양했으나 마야왕후가 들어주지 않았고, 마침내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에는 김춘추(金春秋)가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진평왕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여왕에 올랐다.

천명공주가 동생 선덕에게 양보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太陽)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그때는 마야왕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진평대왕은 용춘공에 관심을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했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했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했다.” 612년의 일이다.

천명공주의 출궁은 그가 성골을 버리고 진골로 족강(族降·신분 강등)됐음을 의미한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 선덕공주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용춘은 선덕공주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선덕과의 혼인을)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됐다. 하지만 용춘은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했다. 진평왕은 용수에게도 선덕을 모시도록 했으나 또 자식이 없었다. 왕위계승자가 된 선덕공주는 612년부터 21년간 왕정을 익혔다. 선덕이 왕위에 오를 때인 632년엔 40살이었다.

신라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터. 선덕여왕은 사후에 도리천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다. 나중에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 무덤 아래에 세움으로써 이 말이 실현됐다. 도리천은 불교의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으로 사천왕 하늘 위에 위치한다.

『삼국유사』 1, 『왕력』편 중 제27 선덕여왕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골 남자가 모두 죽어(聖骨男盡) 왕위에 올랐다…이상은 중고(中古·제23대 법흥왕~제28대 진덕여왕)로 성골이고, 이하는 하고(下古·제29대 태종무열왕~제56대 경순왕)로 진골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국인들이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眞德)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이라 하고 무열(武烈)에서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眞骨)이라 했다.”(『삼국사기』 5, 선덕여왕 8년조)

이러한 기록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선덕여왕의 즉위는 성골 남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성골이라는 점이다.

선덕공주를 왕위계승권자로 선택한 것은 성골종족(聖骨宗族)의 왕위 계승 원리에 어긋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부계제사회(父系制社會)에서 여자도 한 대(代)에 한해 부계성원권을 가지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Ernest L. Schusky, 『Manual for Kinship Analysis』·1972). 다만 그 여자가 혼인을 하여 남편의 집으로 가면 부계(父系)성원권을 잃게 된다. 천명공주가 출궁한 것은 성골 신분을 가진 부계성원권을 잃고 용수의 부계혈족집단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선덕공주는 혼인을 한 후에도 성골 거주구역인 왕궁을 떠나지 않았기에 성골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성골로서 왕위계승권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선덕공주가 혼인했던 용춘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사이에 출생한 아들은 용춘의 부계성원이 되어 성골 신분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자는 한 대에 한해, 그것도 아버지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을 때 부계성원권을 가질 수 있었다.

진평왕은 진지왕의 폐위와 동시에 진골로 족강된 용수보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인 성골 선덕공주를 선택했다. 당시 선덕공주는 용춘 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지만 혼인을 하여 남편의 부계혈족으로 소속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선덕 즉위 뒤 중국선 측천무후 등장
선덕여왕이 즉위한 후인 690년 중국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여자로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705년까지 15년간 재위했다. 측천무후의 즉위는 당 고종의 황후로서 황제가 된 것으로, 당 황실의 왕위계승원리와는 무관한 권력장악이었다. 그렇더라도 측천무후의 즉위는 신라의 선덕여왕·진덕여왕과 같은 여왕의 즉위에서 힘을 얻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선덕의 왕위계승 막바지 과정에도 반발이 있었다. 『삼국사기』 4, 『진평왕 53년(631)』조는 이찬 칠숙(柒淑)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을 서술하고 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평왕은 그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구족을 멸했다. 칠숙·석품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선덕공주라는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일 수 있다.

첫 여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삼국유사』 3, 『황룡사9층탑』조에 따르면 636년 당나라에 유학 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태화지 옆을 지나다 신인(神人)을 만나 대화했다. 자장은 신라에 말갈·왜국이 인접해 있고 고구려·백제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구적(寇賊)이 횡행하는 것이 백성들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신인은 “지금 너의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기에 이웃 나라들이 침략을 도모하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황룡사(皇龍寺)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643년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 건축을 제안하여 탑을 건축하게 되었고 645년 완공했다. 황룡사9층탑은 선덕여왕의 위엄을 높이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사천왕사 근처 낭산의 남쪽 언덕에 있다.

여왕 위엄 높이려 황룡사탑 건립
정작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은 어렵다는 뜻)’라고 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선덕여왕 16년(647) 1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毗曇)의 무리였다(『삼국사기』 5). 비담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비담 일당은 춘추(春秋)를 왕으로 세우려 오래전부터 활동해온 결사인 칠성우(七星友)와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선덕여왕이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떠나기 전 말년엔 칠성우들이 여러 부문에서 왕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1월 17일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들이 마지막 남은 성골인 승만(勝曼·진덕여왕)을 왕으로 세우고, 비담의 난을 진압하였다.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막내동생인 진안갈문왕의 딸로 혼인하지 않고 왕궁에 살며 성골 신분을 유지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여자도 모두 소멸되었다. 그러자 춘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진골왕 시대가 열렸다.

신라인들은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비화에도 공을 들였다. 『삼국유사』 1 『지기삼사(知幾三事)』조에 나오는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조짐이 그것이다.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을 것이라 한 것, 경주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 군사의 존재를 알아내고 잡아 죽이도록 한 일,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한 일이 그것이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의 그림이 자신이 배우자가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근(女根)은 여자의 옥문(玉門·생식기)으로 그 빛이 흰색이며 흰색은 서방이므로 서방의 군사 즉 백제 병사가 왔음을 알았고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갔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무왕대에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는데 불경에 도리천(忉利天)은 사천왕 위에 있어 선덕여왕이 한 말이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위에 오른 후, 세상을 떠난 후 선덕여왕의 특별함을 말하는 스토리텔링이었던 것이다.

여자이지만 성골인 선덕여왕의 즉위는 신라 골품체제의 운용원리를 따른 왕위 계승이었다. 성골과 성골의 왕위 계승 등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밝히기로 한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 교수, 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