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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딱지' 집안, 출가, 환속 … 내 삶 자체가 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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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성동 작가의 고향은 충남 보령이다. 사투리가 섞인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매서웠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음력으로 4월 하순, 순우리말로 찔레꽃머리다. 찔레꽃이 붉게 피기 시작하는 이맘때를 말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67)씨는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말이 곧 정신이라고 믿는다.

 21일 하늘은 파랗고 산은 푸르던 날,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자락에 있는 김씨 집을 찾았다. 인적 끊긴 산속, 그가 글을 쓰고 밥을 끓여 먹고 예불을 올리는 곳이다. 1975년 단편 ‘목탁조’로 문학과 만난 그는 내년 데뷔 40돌을 맞는다. 김씨가 기자에게 상석을 권한다.

 “아니, 선생님 왜 그러세요.”

 “맞아요. 자리 뒤 벽에 ‘백운(白雲)’을 써 붙였잖아요, 제 뒤에는 ‘청산(靑山)’이 있고요. 구름은 흘러가니 객(客)이 있을 곳이고, 산은 움직이지 않으니 주인의 차지죠. 불가(佛家) 선방(禪房)의 전통입니다.”

 갑자기 시간여행을 떠난 느낌이었다. 그가 8폭 병풍에 큼지막하게 쓴 시구도 들어왔다. ‘청산 의의 벽해 창창 편운 전장 송성 소슬(靑山 碧海 蒼蒼 片雲 展張 松聲 蕭瑟·푸른 산이 우뚝하고, 바다는 짙푸르고, 조각구름이 펼쳐 있고, 소나무 소리는 쓸쓸하다)’. 집주인의 기개와 슬픔이 묻어났다.

 - 은둔생활을 즐기시나.

 “아니다. 말도 안 된다. 작가는 세상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아야 글을 쓴다. 저기 쌓인 신문 보따리를 보라. 나는 리얼리스트다.”

 - 이토록 한적한 곳에 사는데.

 “여기 자리 잡은 지 10년이 됐다. 의도적으로 외로움을 택한 거다. 외로워야 뭔가 창조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맨 끝에 있는 게 작가다.”

 -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외롭게 놓아두지 않는 사회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시끄러운 일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 세상에 휩쓸리며 산다. 금전·출세 등 물질주의에 편승해 ‘좋은 게 좋은 것’ 하다가 세월호 사건도 터지게 됐다.”

 - 모두 안타까워하는 대목이다.

 “청해진해운 유병언 회장은 빙산의 일각이다. 도처에 유병언이 있다. 남의 것을 앗아 부를 누린 그를 부러워하는 이가 솔직히 적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세월 우리는 밥그릇 싸움에만 매달려 왔다. 유병언 개인 한 명 잘라내는 것에 그칠 일이 아니다.”

 - 국가개조론이 일고 있는데.

 “서양의학의 대증요법으로는 부족하다. 대들보가 상했는데 서까래만 고치면 되겠는가. 동양의학의 체질개선이랄까,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미물(微物) 하나라도 존중하는 고루살이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 예를 들자면.

 “옛 아낙들은 설거지를 하고 난 물도 마당에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땅속 벌레들이 놀라 다치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란 말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삶과 죽음, 나와 남을 나누지 않았다.”

김성동씨는 올해 아흔둘인 노모와 함께 산다.

 김씨가 산문집 『외로워야 한다』(도서출판 내앞에서다)를 냈다. 이 시대 젊은이를 향한 ‘훈장어른’의 죽비소리다. 한계점에 달한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선비의 24시간을 12조각으로 나눠 올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적바림(기록)했던 『일용지결(日用指訣)』의 틀을 빌려 ‘지금 여기’의 사람다움을 묻고 있다.

 6·25 당시 좌우 대립에 스러져간 아버지, 그에게 한자문화를 물려준 할아버지, 출가와 환속에 이어 문학에 둥지를 튼 그만의 가시밭길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굽이굽이도 담겨 있다. 그는 “내 삶 자체가 소설”이라고 했다.

 - 지금은 디지털문명 사회다.

 “옛 선비처럼 살자는 게 아니다. 우리 각자 잣대를 세워보자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꼴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 가족사가 파란만장했다.

 “1948년 범죄예방 명목으로 수감됐던 부친이 6·25가 터지면서 좌익사범과 함께 처형됐다. 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을 하셨던 큰삼촌은 우익에, 면장을 하던 외삼촌은 좌익에 희생됐다. 친·외가가 함께 사그라졌다.”

 -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나.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선고(先考)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그분이 가고자 했던 길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버지를 다룬 중·단편을 준비 중이다.”

 - 어떤 점에서 그런가.

 “아버지가 남긴 순한문편지 한 통을 갖고 있다. 남로당 박헌영에게 보낸 것인데, 혁명지도자의 철학을 물었다. 유가철학, 인간의 근본을 질문했다. 단순 이념문제 차원이 아니었다.”

 - 좌우 대립은 지금도 여전한데.

 “이념 다툼은 부질없다. 지금까지 가짜배기가 많았다. 국회의원 금배지나 달려고 운동을 했던 사람이 한둘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날카로운 의식이 없다. 우리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고민이 없다. 나는 이런 운동을 ‘헬스’라고 불러 왔다.”

 - 무엇이 문제였을까.

 “공부에는 좌우가 없다. 8대조 할아버지가 쓴 『죽서독서록(竹西讀書錄)』이라는 작은 책이 있다. 1732년부터 30년 동안 읽은 책 이름과 읽은 횟수를 낱낱이 기록했다. 사서삼경은 물론 불경·도경 등 문·사·철을 망라했다. 이게 조선시대 평균적 지식인의 모습이다. 요즘 식자들도 그렇게 정진할까. 자본주의 극성시대. 돈만을 주인으로 떠받치는 건 아닌지….”

 - 21세기 사회를 ‘컴본주의’라고 표현했다. 컴퓨터가 바꿔놓은 놀라운 세상에 딴죽을 걸 필요가 있나.

 “기술적 진보를 왜 부정하겠나. 다만 작가로서 컴퓨터는 세 개의 단점이 있다. 사용하는 어휘가 제한됐고, 문장이 단문 일색이며, 표현에 개성이 없다는 점이다. 문장이 아니라 부호에 가깝다. 깊은 사유를 할 수 없다.”

 - 내년이면 문학 인연 40년인데.

 “제 삶을 ‘3판’으로 요약하곤 한다. 첫째 돌판, 고교 중퇴 학력에 ‘붉은 집안’ 딱지가 붙었던 시절, 프로바둑기사가 돼 고픈 배를 채우려 했다(김씨의 한때 별명은 ‘문단의 국수(國手)’였다). 둘째 중판, 숱한 방황과 진리에 대한 갈증 끝에 중이 되려 했으나 ‘목탁조’가 불교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조계종 최초의 무승적 제적자가 됐다. 셋째, 마지막 남은 글판이다. 성패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읽고 쓰고, 또 읽고 쓸 것이다.”

 - 문학, 나아가 인문학의 죽음마저 거론되는 시대다.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작가는 영원히 ‘씹는’ 사람이다. 그게 예술의 소임이다. 종교도 정치도 욕망의 박람회장이 된 요즘이다. 세계가 완성됐다면, 즉 극락이나 천당에서는 작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그 길밖에 길이 없다.”

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소설가 김성동씨는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3년 전 서울 경운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문즉인(文卽人·글은 곧 사람이다)’이라는 말처럼 그의 글씨는 흐트러짐이 없다. 짜임새가 있고, 기운이 넘친다.

 김씨에게 ‘이 시대 젊은이에게 주는 글(寄靑少年諸君)’을 청했다. 그가 선뜻 ‘마철저(磨鐵杵)’ 석 자를 써내려갔다. ‘갈 마(磨)’ ‘쇠 철(鐵)’ ‘공이 저(杵)’, 즉 쇠 방망이를 갈아서 침을 만든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나 부단히 정진하라는 의미다.

 큰 글씨 왼쪽의 ‘六八(68)’은 올해 그의 우리식 나이. ‘전중(前中)’은 아호다. ‘전’과 ‘중’은 각각 ‘앞으로’와 ‘가운데’를 가리킨다. 김씨는 “우리 젊은이들도 새로운 세계의 한복판에 서 있겠다.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겠다, 그런 자세로 공부해 나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어른들도 귀담아들을 말이다.

김성동의 보물창고 ‘바랑’

비승비속(非僧非俗)-. 중도 아니요 속인도 아닌 김성동씨에게 따라다니는 말이다. 절집과 속세를 넘나들었던 그만의 여정을 드러낸다. 점심을 먹으러 집을 나서려 하자 김씨가 바랑을 짊어 멨다. 바랑은 승려가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 그가 어디를 가든 빠뜨리지 않는 일심동체 같은 물건이다.

 10여 년 사용해 까만 손때가 묻은 바랑 속이 궁금했다. 그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다. “애들 말로 쪽팔리는데…”라며 김씨가 끈을 풀었다.

 우선 책 하나. 신예작가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가 눈에 띄었다. 30대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최근작이다. 그리고 현금이 든 편지봉투. 김씨를 대신해 책을 사다 주는 지인에게 건넬 돈이다. “매주 신문 서평란을 보고 읽을 책을 고른다. 없는 살림에도 매달 책값으로 50만원 정도를 쓴다”고 했다.

 다른 소지품들이 차례차례 나왔다. 우체국 예금통장, 건강보험증, 주민등록증이 든 지갑, 비상용 돋보기, 손바닥만 한 메모장,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수첩이다. 신용카드는 없다. 수첩·보험증 여기저기에 1만원, 5만원짜리 지폐가 비상금처럼 숨겨져 있다.

 절로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죠. 돈을 잃어도 한번에 몽땅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건가요.” 대답이 걸작이다. “그런 면도 있죠. 어떤 경우라도 혼자 살아남아야 해요. 바랑은 저를 보호해 주는 느낌을 줍니다. 극한적 외로움이랄까, 1인분의 고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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