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의 순수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삼맥종이 왕위를 계승한 나이는 7세, 소년시절이었다. 그가 바로 신라 24대의 진흥왕.
왕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551년)는 신라역사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진다. 새해를 맞는 정월 왕은 10년여에 걸친 왕태후의 섭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해 춘3월, 청년왕은 친히 전국을 순수하는 장도에 올랐다. 이 때 진흥대왕은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접경을 살펴보고 깊이 느낀바가 있었다. 고구려는 만주를 무대로 대륙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진 나라였다. 백제 역시 서해를 끼고 반도 서남쪽의 비옥한 평야를 갖고 있어 천혜의 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신라만이 산간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비장한 각오률 했다.
신라의 역사적인 북벌작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신라는 이미 백제와 힘을 합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할 셈으로 70년 동안이나 「나제동맹」을 맺고 있는 사이였다. 백제는 서부를, 신라는 동부를 맡은 것이다.
그 무렵 고구려는 국력이 차차 기우는 형세에 있었으며, 외숙사이의 분란까지 일어 어수선했다. 백제와 신라는 그런 상황에서 기어이 북벌작전을 시작했다.
진흥왕은 약관도 못된 젊은 나이에도 천하를 보는 눈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공동북진에 성공한 지 2년도 못되어 화살을 백제로 돌렸다. 백제중흥의 기도는 이 때부터 좌절되었다.
한강유역을 전부 장악한 신라의 판도는 서북으로는 임진강 연안까지 미치고, 서남은 지금의 평택·성환에 이르러 백제와 인접했다. 진흥왕은 다시금 단독 북진을 계속, 함경도 깊숙이 안변에까지 진격했다. 그 세는 더욱 더 북으로 뻗쳐 함흥을 지나 멀리 이원에까지 이르렀다.
백제의 한강유역을 정복한 이듬해인 진흥왕 16년 가을, 왕은 중신을 거느리고 북한산일대를 순수했다. 북한산의 순수비는 그의 새 영토임을 확인하는 표시였다. 이 비는 후세에 추사에 의해 판독되었었다. 왕은 10여년만에 다시 함남의 황초령과 역시 함남의 마운령을 순수하고 각각 비를 세웠다. 바로 마운령의 비는 육당 최남선에 의해 발견되었었다. 남으로는 창녕(경남)에도 순수비를 이미 세웠었다.
이번 단국대의 발굴「팀」이 발견한 단양의 순수비는 다섯번째의 것. 신라동서의 영토표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에 새겨진 비문은 그 시대의 정치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사료로도 귀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학자들이 해방 후 최대의 사적 발견이라고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