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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영상 2주 뒤 공개한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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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10년 가을부터 구제역이 한반도를 덮쳤다. 이듬해 봄까지 돼지 331만8298마리, 소 15만864마리가 전국 2277곳에 매몰됐다. 2011년 여름엔 매몰지로부터 침출수가 흘러나와 지하수를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일부 지자체가 몰래 매몰지를 이전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상수원까지 사체 썩은 물이 유입됐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되고 국민 불안이 커졌다.

 당시 ‘투명한 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전국 16개 광역지방자치단체와 농림수산부·환경부·행정안전부에 매몰지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하지만 지자체는 환경부로, 환경부는 농림수산부로 정보 공개의 책임을 미뤘다. 결국 2년이 지나 정부가 공개한 건 광역별 매몰지 수 합계와 보강공사 횟수 등이었다. 전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은 “상수원 오염 얘기가 계속 나돌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설득할 수 없었다”며 “공개를 미룰수록 더 많은 루머가 생산됐고 정부의 해명성 정보는 은폐 의혹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비단 구제역뿐만이 아니다. 유해물질 취급 업소의 위치, 건물 노후화에 따른 안전 점검 내용 등 ‘생활안전’과 직결된 정보에조차 일반인은 접근이 힘들다. 서울 성수동에 사는 김현수(40)씨는 세 들어 사는 건물의 안전이 의심돼 최근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개인정보 등 재산권 정보가 포함돼 있어 건물주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 공개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보공개센터 관계자는 “불산 관련 사고가 많이 발생해 취급 업소를 조사하려 했지만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며 “너무 안 주니까 아예 정보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더라”고 했다.

 국가적 재난 관련 정보를 구하기는 더 어렵다. 이 같은 문제점은 최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와 서울지하철 추돌사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부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들은 사고 정보를 가감 없이 공개하기보다는 숨기기에 급급했다. 정보를 틀어쥐고 통제해온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했다.

 지난달 16일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자 관련 기관들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정보 관리에 나섰다. 사고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진도 VTS 기록은 사고 직후 공개되지 않았다. 사고 발생 4일 후인 지난달 20일에야 공개됐다.

해양경찰은 특히 침몰 당시 상황을 담은 구조 동영상은 그보다 더 늦은 지난달 28일에야 내놨다. 이로 인해 편집·삭제 의혹이 일었고 유언비어 확산의 빌미가 됐다.

 또 한국선급 사이트는 폐쇄됐다. 인천해경이 지난 2월 실시한 여객선 특별점검 결과도 김영록(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 요청하고 나서야 공개됐다. 해양수산부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언론에 공개하며 ‘충격 상쇄용 기사 아이템 개발’ 부분만 삭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다른 뉴스거리를 찾아 배포하라는 게 정부의 매뉴얼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명지대 김익한 교수는 “입법부의 요구와 언론의 적극적인 취재로 겨우 사고의 정황이 파악되고 있다”며 “정부 기관들이 정보를 숨기다 못해 파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보화로 인해 사회가 빨리 변하고 있는 반면 정부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지체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한성대 이창원 교수는 “행정권력·정치권력의 가장 중요한 통치 자산은 신뢰”라며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이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통치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 정부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민간과 공유해 협력하는 모델인 ‘정부3.0’을 홍보하고 있으나 현실은 ‘정부1.0’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 간 칸막이가 높은 관료 문화가 특정 사고에 대한 교훈과 대책을 공유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를 두고 이화여대 이명선 교수는 “후진국형 참사가 반복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보공개법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칙적으로 모든 정보를 공개하되 공개할 수 없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네거티브 리스트’를 만드는 쪽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인식·구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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