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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관광만을 생각한 겉치레 사적복원 강화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막상 입구의 요새 강화도가 전사유적으로서 복원되고 있다. 숱한 화강석재와 시멘트로 아주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다. 8월말까지 1차 준공 예정이기 때문에 지금은 마무리작업 단계. 광성진 포대의 석축 공사를 제외하고 거의 끝나간다. 포대마다 옛 화포를 가져다 놓고 기름칠을 한다. 강화군은 물론 경기도 자체로서도 근년에 없던 최대의 공사. 이곳 유적의 복원·보수 총예산은 약10억원.
1년6개월만에 설계·완공하는 작업이어서 그동안 무지하게 빠른 공사를 강행해왔다.
설계를 다시 검토할 겨를도 없었다. 문화재위원회는 『역사 유적을 보수하면서 어찌 위원화의 승인을 받지 않느냐』고 했지만, 공사주관자인 문화재관리국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설계는 관리국 문화재1과의 담당계장에 의해 전격적으로 작성, 곧장 착공으로 들어갔다.
옛 폐허로 따돌림을 받던 이 성은 갑자기 유수한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강화대교의 개통만으로도 인파가 몰렸는데 이제는 강화성을 비롯하여 갑곶·광성·덕진·초지 일원의 포대와 문루가 번듯하게 축조되고 정족산성과 전등사 및 마니산의 유적까지 다시 손질됐다. 더구나 이들 유적지를 잇는 아스팔트길이 사방에 뚫렸으므로 오는 가을부터 관광버스가 줄달아 누빌 것이 능히 예상된다.
강화 전사유적의 이같은 복원은 최근세사에 초점을 두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넘나들어 교전을 벌이고, 또 일본배가 들어와 끝내 수호조약에까지 몰고 가던 한말의 풍운을 설명해 주는 유적들이다. 그렇게 보면 강화읍성의 복원은 관광을 위해 덤으로 호사하는 셈이랄까.
한말에 강화섬 둘레에 있던 포대는 무려 72개소. 그것들이 이번에 다 복원·보수되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강화읍에 가까운 거리의 유명한 곳 10여개소만을 단장했다. 섬 전체로 보면 콧잔등에 속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강화도의 유적을 역사적으로 살핀다면 최근세의 그것보다는 고려 것이 더 소중하다. 몽고병란으로 말미암아 13세기 중엽에 29년간 도읍했으므로 궁궐과 왕릉이 있고 팔만대장경과 고려청자도 여기서 시작됐다.
그후 7백년의 역사가 뒤바뀌며 고려 때의 유적은 폐허가 돼 알아보기 힘든 상태지만, 눈 여겨 보면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대장경」과 가장 밀접한 남문 밖의 선원사터가 지난해 발견돼 사적으로 지정됐다. 고려궁궐터도 엄밀히 발굴해 보면 유해가 더 드러날 것 같다. 섬남단의 이궁이며 왕과 왕비의 능도 4개나 있고 청자를 굽던 자리도 몇 군데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복원작업에서 단 한 개도 시험적인 발굴조차 해보려하지 않았다.
정말 강화 유적은 전문가의 참여없이 행정적으로 손질해 버려도 괜찮은 것인가.
읍성내 고려궁지의 경우를 보자. 공사는 우선 서울의 궁궐 담장에서나 보는 사고석으로 반듯반듯하게 들러쳤다. 현존하는 한말관아 건물의 툇돌과 층계는 모두 장대석으로 치장했고 마당의 통행로엔 곱게 다듬은 포석을 깔았다.
창덕궁·경복궁보다도 더 분에 넘치는 호사치레다. 뿐더러 옛 건물지에는 미리 장대석 석축을 쌓은 뒤 발굴을 시작하는 난센스를 빚었다. 그리고 1, 2m남은 가장 고식의 축내마저 신식으로 변조시켰다.
고려궁지 입구 개울의 돌다리는 허망한 파괴의 대표적 예.
이건 아예 유적에도 끼지 못했다. 금년5월 이른바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시멘트 다리가 가설됐는데 그 석재는 현장에서 토막토막 견칫돌로 깨버렸다. 갑곶 가까운 흥예석교도 낡은 대로의 옛 맛이란 없어졌다.
강화성은 주로 읍성 역할의 내성을 보수했다. 이 석성은 병자호란 뒤에 개축한 것이어서 비교적 유구가 많이 남은 편이고 큰손을 보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문루복원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기왕 보수하는 터라 성문의 여장을 사고석으로 축조하는 등 가능한 한 견고하게 꾸몄다.
견고하고 보기 좋게 꾸미려는 복원안은 포대에서 절정을 이룬 느낌이다. 포대는 바다로 삐쭉이 내민 묏부리 끝에 설치돼있다. 그러니까 포대의 밑부리까지 헐어내 시멘트로 1m 두께를 채워 넣으며 석축을 다시 쌓았다. 큰 잡석을 골라 이를 맞춰 쌓았던 전날의 포대모습은 간데가 없다. 여강 또한 마찬가지. 옛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게 아니다.
강화도는 한강 입구의 요새. 이 땅의 이름을 고구려가 「혈로」라 한 것이나 신라가 「해로」라 한 것이 모두 목을 지키는 요새임을 뜻한다. 조선시대 인조 때 왕실이 호란을 피해 이곳에 갔고 개화기의 외국함대도 이곳을 노렸다. 오늘날에도 역시 국방의 요새.
4백35평방㎞에 불과하지만 역사의 희비로 얽힌 섬이다.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버려 둘 수 없었듯이 앞으로도 소중한 길목이 돼 줄 것임에 틀림없다.
도움말 주신 분
차문섭씨(단국대교수·국사학) 이강칠씨(전 육사박물관장) 최영희씨(국사편찬위원장) 문명대씨(동국대교수·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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