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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학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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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의 백두학원이라면 재일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었다. 8·15해방이 됐을 때 재일 동포들은 일본학교에 다니던 자녀들을 거의 퇴학시켰다. 그리고는 서당식의 국어강습소에 입학시켰다.
이때 동포들의 교육에 선수를 친 것은 조총련이었다. 국어강습소를 정비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이에 맞서 46년 3월 민단 측이 최초로 설립한 학교가 건국 소·중·고등학교-.재일 민족 단체 백두동지회와 재일 동포들이 만든 백두학원이 설립모체였다.
『장래 조국의 중견이 될만한 유위의 인재육성을 위해서 지·덕·체육의 전인적 신장을 목적으로 한다』는 교육목표를 가진 건국학교는 태극기를 걸고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일본이 재일 동포들의 교육을 규제하고 나섰을 때도 백두학원은 살아 남았다.
49년10월 일본정부는 일본 전국의 한국인학교 3백37개교에 대해 폐쇄 및 조직개편 명령을 내렸다. 조직개편 신고기간인 11월4일까지 1백28개교가 신청했으나 백두학원 하나만 정식인가가 났었다.
이 학교가 태극기를 내린 것은 1950년. 중립계를 표방하면서 실은 뒤로는 조총련으로부터 매년 1천만「엔」의 교육자금을 받았다고 한다. 60년대의 통계를 보면 민단은 조총련의 물량공세에 눌려 있었다. 60년대 말 재일 동포의 취학자 18만명 가운데 78%인 14만명이 일본학교에, 19%가 조총련계 학교에, 그리고 나머지 3%정도가 민단계 학교에 취학하고 있는 정도였다.
물론 조총련의 뒤에는 북괴가 있었다. 북괴는 교육이 인도적인 문제라는 구실을 들어 교육원조금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송금했다. 북괴는 57년4월 재일 조선인 중앙교육회 앞으로 최초로 1억2천1백만「엔」을 교육원조비 및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보냈다. 그 이후 북괴가 교육비라는 명목으로 보낸 돈은 74년까지 1백50억1천만「엔」에 달했다.
이 모두가 교육비에 쓰여졌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북괴의 자금지원이 재일 동포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사실이다. 민단계의 정식 인가된 학교가 10여 개교인데 비해, 조총련계가 1백10여 개로 10배가 넘는다는 사실로도 증명이 된다.
이번 8·15 광복절 기념식 때 백두학원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됐다. 27년만의 일이다.
4백여 명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애국가를 합창했다. 오랜 숙원이 풀린 느낌이다. 정부의 꾸준한 대책, 조총련계 동포의 연이은 모국방문, 북괴의 내외실정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보다 민족교육이란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만 달성된다는 깨우침이 재일동포사회에 서서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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