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2)제56화 낙선제 주변(41)|김명길<제자 김명길>|출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와 함께 궁에 들어와 쌍동이처럼 지내던 정인길은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던 날 인길이는 꼭 나아서 돌아오겠다며 요금문으로 나갔는데 그것이 인길이와 나의 마지막 인사였다.
요금문은 금호문에서 제서동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데 환자나 다 죽게 된 사람이 나가는 문이었다. 왕족 외에는 궁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중법도 때문에 몸이 불편해지면 우리들은 죽음을 재촉이나 하듯 황황히 이 문으로 빠져 나온다.
조카 집이나 본가에 머무르면서 병이 완쾌되면 다시 입궁할 수 있는데 인길이는 독감에 얼음찜질을 하는 바람에 그만 죽어버렸다고 한다. 인길이와 난 다른 나인을 대할 때와는 달리 서로 반말을 하며 스스럼없이 지냈는데 그렇게 갑자기 죽으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노상궁 중에는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가 우리들에게는 가장 조마조마한 시간이다. 교군을 불러 우리들은 굳어 가는 시체를 억지로 집어넣어 산 사람이 앉아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내보내곤 했다. 대궐에서는 베·무명 등의 사물을 주고 망뇌상 안에는 고정된 녹을 내려 일생을 왕을 위해 바친 궁녀에게 위로의 뜻을 표시한다.
왕족이면서 게다가 아프지도 않은 몸으로 요금문으로 나간 사람이 있는데 조선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였다. 그분은 유명한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비를 당하고 이 문으로 눈물을 뿌리며 나갔다고 한다. 서인생활 5년만에 복위되었으나 요금문으로 나갈 때의 굴욕감이란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궁녀 하나가 죽어 자리가 비게 되면 여기저기서 궁녀로 넣어달라는 간청이 제조상궁 앞으로 슬그머니 불어닥친다. 실생활이야 어떻든 궁녀들은 좋은 옷에 좋은 음식으로 호화로와 보이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나인이 되기를 원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까다로운 성격에 남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물론 왕의 승은을 입을 수 있다는 1천분의1의 행운을 노리고 입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인의 뒷 생활이 어떻든 한번 궁에 들어오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제조상궁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하면서 애를 쓴다. 제조상궁은 그만큼 큰 영향력을 가졌는데 남자들도 벼슬을 하나 따려면 제조상궁에게 먼저 청을 넣을 정도였다.
지밀나인의 자리가 비면 대개 침방이나 수방에 있는 나인들로 보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밀을 제외하고는 가장 어린 나이에 선출하고 지밀만큼 까다롭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인길의 뒤를 이어 들어온 나인은 별궁에서 나인의 법도를 배우고 있던 박창복 상궁(75·당시 17세)이었다. 박 상궁과는 6·25를 함께 겪었고 윤 마마 승하도 함께 지켜보았다.
궁녀들 중에는 시집살이 아닌 시집살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이도 많았다. 특히 궁중 법도가 많이 해이해져 출궁의 제약도 약화되었던 순·고종시대에는 이런 나인들이 속출했다.
출궁한 궁녀들에게는 약간의 제약이 뒤따랐는데 궁중이야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됐으며 벼슬하는 사람의 처첩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바람이 든 젊은 나인들도 뿔뿔이 헤어져 나갔다. 이들 중에는 지금 어떤 큰 회사의 사장 부인이 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왕터를 딛고 나라의 녹을 먹고살다 도중에 나간 궁녀들은 대부분이 오래 살지 못하고 밥도 굶는 가난뱅이 신세로 몰락하고 만다. 이것은 내 개인의 감정적인 기분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으로 얻은 결론이다.
궁녀가 자진해서 궁을 뜨는 것 외에 어쩔 수 없어 대궐을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될 때다.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어릴 때 집을 떠난 나인들의 원한이 뭉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도 숙종 때도 이런 기록이 있었는데 세종은 중궁시녀 7명, 무수리 6명 등 모두 15명의 궁녀를 내보냈다고 한다. 숙종 10년에 있었던 가뭄으로 눈물을 머금고(?) 출궁한 궁녀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