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서양사람들은 나라가 어지러우면 먼저 역사책을 본다고 한다. 그 속에서 슬기와 교훈을 찾으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도 슬기와 교훈의 장들은 많다. 강대국들의 차가운 눈초리와 모진 질곡을 견디며 그래도 5천년을 지탱해온 우리 민족은 무엇인가. 슬기와 의지를 갖고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때로는 어지러운 역사일수록 어지러운 나선들이 난무했었던 것은 더없이 부끄러운 일들이다. 조선왕조 말기의 음산한 풍경들을 보자.
임오군란으로 나라는 한창 어지러운데 국내정치인들의 시선은 온통 북으로 남으로 엇갈려 있었다. 왕실을 중심으로한 수구파 세력들은 양과 왜를 배척하며 청나라에 등을 기대고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명치 이후 어깨를 으쓱대던 일본에 손을 내미는 파도 있었다.
바로 김옥균과 같은 인물은 일본의 등에 업혀 수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음모까지 꾸미고 있었다. 역사는 그 어느 편도 아니었다. 누구도 자강과 자존을 생각지 않는 현실에서 어부의 이를 보는 것은 외세뿐이었다.
역사의 장면은 바뀌어 대원군(흥선)의 쇄국정책에 이르러서는 그 시선이 너무도 혼미했다. 잇따른 양요 속에서 세계를 보는 눈은 어두울대로 어두웠다. 일본에 대해서도, 서양에 대해서도 거의 맹목적인 외국공포증(zenophodia)을 품어 반도 밖의 사정은 한치 앞을 내다보려하지 않았다. 나라는 「정치의 고아」「문명의 고아」를 면치 못했다. 민비가 그 뒤를 이어 집권을 하면서는 하루아침에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이번엔 일본과 두 손을 잡게 되었다.
역사는 어느 한곳에도 몸둘 바를 모르는 혼미만의 연속이었다. 군란과 정변이 뒤따랐다.
이들은 우리 근세사의 뼈아픈 교훈들이다. 그런 교훈을 되새기며 오늘의 현실을 보는 감회 또한 개운치 않다.
최근 어느 원로정치인은 일본수상에게 서한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는 한때 우리나라와 국민을 대표했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서한의 문맥과 내용은 우선 덮어두고라도 그 자체로 보아 의연치 못한 것 같다. 원로의 자존도, 나라의 체면도 아랑곳없이 외국의 수상에게 집안 일을 하소연하는 심사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딘지 오늘의 역사 속엔 음산한 옛 그림자의 한 자락이 비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젓하고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자세다.
우리는 때때로 역사책을 보는 대범한 자세를 가져봄직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