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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동상, 인품표현에 힘써야-충무공 동상 제거를 계기로 현황을 살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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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광화문네거리의 거대한 조각품인 이 충무공 동상을 헐어버린다는 결정은 그 동안 난립된 기념조각에 대한 충격적인 반성을 제기하고 있다.
10년이 못돼 시민들의 비난 속에 제거케 된 광화문의 동상은 전국 수 개 처의 충무공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의 역사적 성격으로 보나 건립위치와 크기 면에서도 우리 나라 기존 동참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개인이나 사사로운 단체가 건립한 게 아니고 거족적인 애국선열 조상건립 위가 주선한 일련의 선열등장. 충무공상은 68년 조각가 김세중씨가 만든 전신 17.49m의 거작이다.
이러한 획기적인 동상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워야겠다는 표면적 이유는 아산 현충사에 모신 표준 영정과 얼굴이 맞지 않을뿐더러 몇 가지 고증이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제작당시 고증 위를 거쳤기 때문에 작가 측은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얼굴이 안 맞는다든가 칼이나 북이 잘못 놓이고 옷이 길다는 동의 지적은 지엽적인 구차한 구실. 문제는 전체적 인상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된다. 거기에서 풍기는 인품이 온 국민에게 추앙 받을 만한 감동을 못 주기 때문. 선열에 대한 「이미지」를 그르칠까 두려워 새로 세우자는 여론이다.
물론 갑주의 처리가 투박해진 것은 사실이고 장식적인 소품으로서의 북과 거북선에 재고할 여지가 많다. 좀더 면밀히 살핀다면 거인으로서의 전자 비례는 무난하다하더라도 몸 자세엔 무리가 적지 않다. 복부를 앞으로 내밀어 너무 당당한데 치우쳤고 특히 턱을 바싹 당기고 눈을 지릅떴다. 상식적으로 이충무공은 지·용·덕을 겸비해 선비 같은 장수인데 현재의 등장에선 용에 치우친 인상이 짙다.
충무공의 본디 초상이 전하지 않는 한 오늘의 그것은 어차피 창작일 수밖에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 체취를 얼마만큼 심도 있게 그려내느냐 하는데 작품의 우열이 가려질 따름이다.
이런 인품의 표현문제는 근래 무수하게 건립되는 기념조각에 공통된 과제. 기념탑·상징적「모뉴멘트」및 소규모의 흉상에 이르기까지 50년대 이후 국내에서 약4백 점이 제작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경향의 시가지나 공원에 자리잡은 것도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시가지나 공원에 건립되는 것은 대중을 의식한 공공의 기념상이며 이것이 대중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다면 반성의 여지가 있다.
공공성을 띤 동상으로서 장충단공원의 이준열 사상은 체구가 너무 왜소하고 유관순 상은 어딘지 서양사람의 얼굴인데다 뒤로 뻗은 다리의 골격이 어긋나 보이고 자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직동 공원의 신사임당 상은 아랫배가 불러 어색하고 치맛단이 퍼짐으로써 한복의 조형미도 없다. 남산 김유신 기마 상은 주저앉은 말에서 나를 듯 전진기세의 장군 상이고 김포가도의 을지문덕 상은 동작이 풀리지 않는 격검 자세로 무리를 했다.
덕수궁의 세종대왕좌상은 의자의 「쿠션」(옛날엔 나무의자)속에 푹 빠진 느낌인데다 무릎의 골격 선이 곧아서 부자연스럽고 「파고다」공원의 손병희 상은 귀와 복숭아 뼈가 수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조각의 기초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얼굴이 닮고 안 닮고는 둘째 문제다. 보는 사람들의 감동이 클수록 그것은 곧 우수한 조형미를 갖춘 것이어서 사소한 「디테일」이 감춰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 나라의 동상은 움직이는 인체「데상」이 허술하고 의상 같은 것의 질감을 표현하는 수련이 미흡하다.
현재 이들 기념조각을 해내는 작가는 김경승 김세중 김정숙 김영중 최기원 김만술 최만연 이일자 윤영자 홍도순 백문기 문수진 김인식씨 등 10여명. 윤효동 송영수씨는 작고했으나 유작이 현존한다.
그런데 개중의 조각가는 제작을 주문 받아 제자들에게 실제 일을 일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른바 「기업청부」니 「하청조각」이니 하는 일부의 추문이 그것이다. 또 주문 자체가 동상과 대를 따로 맡기기 때문에 서로 걸맞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특히 발주 측이 제작 원가에 가까운 적은 비용으로 짧은 시일(동상3∼6개월) 안에 완성하기를 요청하는 데도 항시 무리가 뒤따른다.
우리 나라에서 공공의 성격을 먼 기념조각의 역사는 30년 남짓하다.
그러나 60년대 초 태평로 거리에 석고상을 세우던 양상에서 지금 별로 발전했다 할 것이 없다는 게 중평. 그 점은 작가나 기획하는 측이 마찬가지다.
이들 기념 조각에 대한 비난은 우선 작가가 받아야겠지만 발주하고 돌보는 「시스팀」에도 적잖은 책임이 있다. 이번 광화문동장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번질 경우 과연 그 모든 것을 다시 세울 것인가.
과거에 고증을 했다지만 실제 작가가 임의로 제작한 게 태반이고 재삼 검토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다시 건립하는 것은 작가선정과 실속 있는 고증「팀웍」및 건립 환경 등 사전에 세심하게 배려해야겠다는 것이 일치된 여망이다. <이종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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