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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글 박중희·사진 이창성 특파원-유럽의 우등생을 만든 「게르만 기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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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라인강 기적」은 틀린 말|영국인 3사람 몫 둘이서 해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섰다든지, 돌덩어리가 갑자기 떡 덩어리가 됐다든지 했다면 기적이지 어째 이게 기적이라고들 하는 겁니까?』남들이 다들 그러길래 덩달아 『「라인」강의 기적』운운하는 말을 꺼냈다가 여기 사는 교포에게 이렇게 호통을 맞았다. 남이 일껏 비지땀을 흘려 해놓은 것을 기적이라고 하다니 그건 도대체가 당찮다는 게 그가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이었었다.

<열심히 일한 땀의 결정>
정말 독일사람들이 남보다 비지땀을 정확히 얼마나 더 흘렸는질 근량으로 달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꽤 부지런하다는 건 확실하다. 옆 나라 영국과 비해 예를 하나 들어본다. 상오11시쯤이라고 하자. 영국에서면 인사는 십중팔구「굿·모닝」이다. 여기 독일에선 영락없이 「굿텐·타게」, 벌써 낮 인사다. 독일에선 그때쯤이면 학교 건, 공장이 건, 과업을 시작한지 적어도 세시간은 지난 뒤다. 영국에선 그 반이 지났으면 잘 지났다.
하긴 독일사람들은 그 대신 일을 일찍 끝낸다. 일하는 시간의 길이는 영국이나 서구 딴 나라와 같은 일당8시간. 그러니까 일을 일찍 시작한다고 많이 하는 거는 아니다. 적어도 작업장만을 놓고 라면 그렇다. 그러나 대저 낮의 시간이란 「생산적」이고 밤의 시간은 「소비적」이다. 일찍 시작하는 독일사람에겐 낮은 길고 밤의 생활은 짧다. 밤 9시만 돼도 통금처럼 시가가 「죽는다」.
일의 밀도나 구체적인 통계를 보자. 영국「케임브리지」대학「트리니티」경제학 연구소의 「클리퍼드·프라텐」소장이 최근에 낸 총계론 서독노동자들의 생산성은 영국노동자들의 그것보다 33%가 높다. 영국에선 세 사람이 하는 일을 독일에선 두 사람이 하는 셈이다.
또 하나. 파업의 문자대로의 뜻은 일을 안 한다는 거다. 1960년∼1975년간 노동자 1천명 당 파업으로 잃은 일수는 서독의 경우 3백10일, 영국이 4천1백70일, 「이탈리아」는 1만8천1백70일이었었다.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한가진 분명하다. 서독사람들이 남보다 부지런히 일을 더 많이 해왔다는 것이다. 우리 교포까지가 「라인강에 기적은 없었다」고 기자에게 덤벼들듯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이겼다"|자만이 없는 강한 공동체의식>
『독일사람들이 민족적으로 한가지 아주 잘한 게 있다. 그건 그들이 전쟁에 졌다는 거다. 』서독이 경제적으로 전승국들을 누르고 이겨온 까닭을 얘기해 보라니까. 「프랑크푸르트」의 한 신문기자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럴듯한 이 말은 실은 그가 독창해 낸 건 아니다.
기자가 「런던」에 주재하고 있다니까 거기서 흔히 하는 말을 뒤집어 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영국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그들이 전쟁에 이겼다는 거다』라는.
이겼기 때문에 그들은 자만했고, 안일에 빠지고 게을러졌다. 「구태의연하다」는 말은 오히려 좋은 말로 통하기까지 했다. 독일은 그 거꾸로였다. 패전으로 온 나라가 쑥밭이 됐던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었다.
공장도 그래서 모두 새로 진 거다. 새 거니까 보다 현대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됐다.
정신면에서도 그랬다. 또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간엔 공동체의식이나 집단이익이라는 게 유달리 돋보이게도 됐다.
서독의 노총위원장「오스카·메터」는 실업 율을 낮추기 위해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수입을 나눠 갖자고 해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우선은 동료애 때문이었겠지만 국가적인 규모에서 경제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는 거다.
그래봤자 되는 꼴이 신통치 않다면야 제아무리 독일사람이라 한들 제 생각부터 내세우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고 까닭도 없다. 그러나 서독은 경제적인 우등생이다.

<「악순환」아닌 「양순환」>
작년 소위「스태그플레이션」으로 형편들이 말씀이 아니었던 때도 서독의 국민총생산은 5.5%가 늘었고 「인플레」는 4%, 실업 율은 4%에 멈췄다는 서구로선 놀랄만한 성적을 올렸다. 그들은 하역에서도 「스위스」와 더불어 흑자(3백45억「마르크」)를 올린 희귀한 나라의 하나다. 그 혜택은 높은 생활수준과 복지의 형태로 국민에게 돌아온다. 그래 그들은 흔히 듣는 「모델·도이칠란트」(모범독일)란 말이 수상 입에서 나온 거라고 해서 양념을 쳐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국 잘 하니까 믿는다. 또 믿으니까 잘된다. 악순환이 아닌 「양순환」이다.

<사과 꼭지만 남은 식탁|부끄러운 일…긴 꽁초·남긴 음식>
「호텔」방을 치우는 아주머니가 딴 건 말쑥히 정돈을 해놓으면서 담배 재떨이만은 이틀째나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래 사흘째 아침, 아주머니보고 『웬일이냐?』하니까 그녀는 재떨이에 수북히 쌓인 길쭉길쭉한 꽁초들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저거 모두 버리시는 겁니까?』
「메르세데스·벤츠」자동차공장 직원식당 홍보부당이사「디저트」접시에 사과꼭지 하나만이 달랑 남았다.

<천덕스럴 정도의 검약>
사과 하나가 확실히 통째로 나왔으니까 껍질도 먹고 씨까지 먹어 삼킨 게 분명하다. 나중에 교포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는 독일 사람 집 식사에 초대 당해 갈 때면 한끼를 미리 굶었다 간다는 것이다. 거기 가서 밥 톨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울 수 있기 위해서고. 또 그건 음식 접시에 뭘 남겨버린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쯤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었다.
우리로선 좀 천덕스럽다할 지경으로 그들에겐 낭비가 없다. 없는 게 또 있다. 소위「최고족보」라는 것도 없다. 시계면 「롤렉스」, 구두면 「말리」, 뭐, 우비면 「바바리」…. 이런 식으로 뭐면 뭐다 하고 필요이상으로 기를 쓰고 사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기풍도 없다.
이름난 신문 논설위원 집 응접실에 JODK경성방송국시대 것 같은 고물「라디오」가 앉아 있길래 골동취미가 있느냐 하니까, 그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 거북하게된 일이 있었다.
「라디오」건 구두건 뭐건 실용성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과분한 소비도 없다. 얼마 전 경기를 회복시킨다고 세금을 좀 깎아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분의 돈은 시중엔 나오지 않고 은행에 몰려들어 저축만 더 늘었다는 얘기다. 「인플레」가 안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긴 1930연대「인플레」로 그렇게 민주적이던 「바이마르」공화국도 잃고 그 덕에 「나치」화도 겪었던 그들이라 「인플레」에의 두려움이 그들을 어느 만큼은 견제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까닭은 역시 그들 몸에 밴 검약하는 태도다.
그렇다고 돈을 움켜쥐고 있다가 죽는 건 아니다. 작년 한해 외국여행으로 만도 그들은 자그마치 백억「달러」를 썼다. 그러나 그건 딴 나라에 가서 뿌렸고, 뿌릴만한 능력들이 있어서 뿌린 거다. 또 여행이란 그들에겐 그저 소비라기보다 이를테면 「배터리」의 재충전이라는 생산적인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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