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고뇌를 대변한 「의지의 시인」|이산 김광섭 옹의 생애와 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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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0여년 간의 시작활동을 통해 민족정신의 고뇌를 대변해왔던 원로시인 이산 김광섭씨가 23일 작고했다. 72년여에 걸친 이산의 생애는 한편 다채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한 그것이었다.
1905년9윌22일 함북 경성군 어대진 읍에서 출생한 그는 32년 일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 후 그 이듬해 중동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다른 시인들이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던 것과는 달리 37년 시집『동경』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이산은 그후부터 저항적인 그의 시 정신 때문에 일제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시 세계는 다음과 같은 그 자신의 말로 요약된다. 『내 생애의 시발은 바로 우리 민족수난의 시발이었다. 성장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내 가슴속깊이에서 움터 나왔다. 이것이 내시의 뿌리였다.』
이 같은 그의 강렬한 민족정신은 마침내 41년 그로 하여금 3년8개월에 걸친 형무소생활을 시작하게 한다. 죄목도 조선어 과목폐지반대·동아일보 폐간반대 등을 학생들에게 선동했다는 것.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그가 맞은 8·15해방은 더할 수 없이 감격적인 것이었으나 그것이 곧 민족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문학·사회운동은 보다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45년9윌 중앙문화협회를 결성, 좌익문인에 정면으로 맞선 이산은 그후 언론인(민중일보 편집국장)관리(군정청공보국장·대통령공보비서)교수(신흥대학·이화여대)등 활동의 폭을 넓히면서도 시에 대한 강한 집념을 버리지 못해 주목받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의 제2시집『마음』(48년)에서 나타나는바 이 무렵 그의 시 세계는 초기의 그것보다 한결 원숙해져 삶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정취가 깊이 담겨져 있었다.
65년4월 서울운동장야구장에서의 갑작스러운 졸도로 회생이 불가능한 듯 보였던 그는 삶에의 의지, 시에의 의지로 죽음의 그림자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빚을 찾았다. 그후 10여년 동안 발표한 그의 작품들은 원로시인답게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한편 강인하고 날카로움을 지닌 문제작들이었던 것이다.
그 자신『대표작이며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한바 있는 『성북동 비둘기』(69년)는 그의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획을 긋는 대단한 작품이었다.
외유내강의 전형인 이산은 최근까지도 시작의 정열을 식히지 않았다. 가볍게 산책하는 일 외에는 원고지와 씨름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 얼마 전『나의 시작태도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문학외적인 일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시를 깎고 다듬는데 다소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 이산-. 그러나 그가 이룩한 문학의 업적은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정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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