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사태 벼랑으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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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신임 사장 인선을 둘러싸고 불거진 KBS 사태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노심(盧心)을 반영한 낙하산 인사로 KBS의 정치적 독립이 훼손됐다"며 서동구(徐東九) 신임 사장의 정당성을 부정해온 KBS 노조는 2일부터 사흘간 조합원 파업 찬반 투표를 벌이기로 했다.

사장 임명 9일 만에 조합원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파업(제작 거부)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KBS는 1997년과 99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와 통합방송법 제정에 항의해 다른 방송사들과 연대 파업을 벌인 적이 있다.

노조는 또 민변 소속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자문변호인단을 구성, 사장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낼 계획이다. 전국언론노조 역시 '청와대 1인 시위'로 지원 사격을 하기로 했다. 끌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겠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다.

徐사장은 이와 관련, "노조는 물론 모든 직원.단체와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 그는 자신이 개혁 인사며 방송 개혁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이 있다고 말한다.

徐사장은 KBS 사보에서 "불균형 인사를 시정하고 민주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나가는 한편 매체 비평.시사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매일 아침 벌어지고 있는 출근 전쟁은 노사 간의 인식 차이를 좁히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徐사장은 지난달 28일 청원경찰 1백여명을 동원해 어렵게 첫 출근을 했다. 다음날에는 노조가 모이기 전인 오전 6시40분 KBS에 들어섰다. 徐사장은 노조가 새벽부터 대기한 31일에는 "밖에 일이 있다"며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사 모두가 아침마다 피곤한 007작전을 벌이고 있다.

물론 노조에도 고민은 있다. 가장 큰 고민은 파업 찬반 투표에서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대응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파업에 반대한다면 노조의 기세는 꺾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시민단체까지 합세해 사장 선임 과정의 부당성을 주장한 마당에 슬그머니 칼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KBS 직원들 사이에서는 "아무개가 벌써 줄을 섰다더라"는 소문이 꼬리를 잇고 있다. 이래저래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KBS호(號)는 흔들리고 있다.

이상복 기자

<사진 설명 전문>
지난달 27일 첫 출근에 나선 서동구 KBS 신임 사장(맨 오른쪽)에게 김영삼 노조위원장(左)이 “사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노조의 본관 봉쇄로 이날 徐사장은 KBS에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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